Scenovela
KOEN
← 내가 그린 골목에 누군가 서 있었다

10화. 기록

그 밤 이후, 시우는 빠르게 비어 갔다. 이제 자기 방 구조도 더듬거렸다. 화장실이 어느 쪽인지, 펜을 어떻게 쥐는지. 어떤 단어들은 입에 담기도 전에 사라졌다. 손에 쥔 컵의 이름이 뭐였는지, 방금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그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한 획도. 그런데도 계속 비어 갔다. 하리는 장부 맨 아래 칸에 그걸 적어뒀다. ― 새로 청구된 것이 아님. 그 밤에 매겨진 값이, 아직 빠져나가는 중임. 골목은 한 번 값을 매기면 두 번 묻지 않았다. 다만 다 빠져나가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시우
시우 ― 새로 그린 건 없었다. 그런데도 비어 갔다.

하리는 떠나지 않았다. 매일 찾아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다이어리를 소리 내어 읽었다. 마치 그게 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가님은 새벽에 작업하는 사람이에요. 식은 커피를 좋아하고. 마감을 무서워하면서도, 끝까지 그려요. 골목이랑 간판 사진 찍는 게 취미고. 처음 그 골목을 그린 날, 가본 적도 없는 골목이었는데― 그게 다 시작이었어요.

시우·하리
시우·하리 ― 매일, 읽어줬다.

시우는 멍하니 들었다. 자기 얘기인데, 꼭 남의 얘기 같았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가 닿는 동안엔, 잠깐씩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빌려 가질 수 있었다. 추운 손을 잠깐 모닥불에 쬐듯이.

그날은 시우가 먼저 물었다. 낡은 권의 앞표지를 열면 나오는, 톱니처럼 남은 자국. 첫 장이 뜯겨 나간 자리였다.

…여긴 왜 비어 있어요.

제가 뜯었어요. 열두 살 때. 할머니가 저를 못 알아보기 시작한 해에, 할머니 얘기를 거기 적었거든요. 몇 년 뒤에 다시 읽었는데― 거기 적힌 사람이랑 제 기억 속 사람이 달랐어요. 제가 잘못 적은 건지, 제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뜯었어요.

그다음부턴 하나도 안 빼고 다 적었어요. 다 적어두면, 나중에 뭐가 맞는지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그 자리는, 십수 년째 비어 있었다. 뜯어낸 자리 다음 장에 하리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시우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무엇을 적을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리라는 걸, 어쩐지 알 것 같아서.

하리 씨. 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그려도 될까요. 이번엔 잃는 게 아니라, 끝내는 거예요. 관 씨도, 나도, 다음 사람도. 이 골목을 닫는 그림.

안 돼요.

그녀는 다이어리를 덮지 않았다. 오히려 앞쪽으로 넘겼다. 왼쪽 열엔 그림, 오른쪽 열엔 값. 커피 한 잔 ―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 하나. 골목 하나 ― 비 오는 날의 부엌. 할머니의 다리 ― 고향, 학교, 친구들의 얼굴. 그녀의 손가락이 오른쪽 열을 천천히 짚어 내려왔다.

보세요. 그림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골목은 그 진심을 어디서 길어 왔는지를 봐요. 그 우물을 가져가는 거예요. …작가님. 그 그림의 우물이 뭔지 아세요?

시우는 답하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하리가 대신 말했다. 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계산을 끝낸 사람의 목소리였다.

커피 한 잔에 사람 하나가 나갔어요. 할머니 다리엔 작가님이 살아온 자리가 전부 나갔고요. 이제 작가님한테 남은 게― 작가님밖에 없어요. 그리면, 작가님이 값이에요.

시우·하리
시우·하리 ― 그리면, 작가님이 값이에요.

알아요.

두 글자였다. 하리는 그 두 글자에 한참 멈춰 있었다. 모르고 하는 사람은 말릴 수 있다. 알고 하는 사람은― 옆에 있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럼 약속해요. 다 잊어도― 이건 두고 가요. 그래야 제가, 작가님을 다시 찾아낼 수 있으니까.

시우는 다이어리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누군가 자기를 이렇게까지 적어뒀다는 게, 잊지 않으려 이렇게 애써 준 사람이 있다는 게― 어쩐지, 울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그날 밤, 그가 잠든 뒤에 하리는 다이어리를 규칙 페이지까지 넘겼다. 셋이던 규칙 아래, 언젠가부터 넷째 줄이 늘어나 있었다. 시우가 제 손으로 적은 페이지가 하룻밤 만에 백지가 되던 날, 그녀가 적어 넣은 줄이었다. ― 골목은 그림만 받는 게 아니다. 진심을 담아 완성한 것이면, 무엇이든 받는다.

그녀는 그 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한참, 그러고 있었다. 그러곤 다이어리를 덮고, 불을 껐다.

하리
하리 ― 넷째 줄에, 손가락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