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자화상
시우는 펜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잡는 법조차 거의 잊었던 손이, 펜을 쥐자 천천히 기억을 되찾았다. 옆에서 하리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말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 뒤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마지막까지, 기억해 주려고.
그는 골목을 그렸다― 여는 게 아니라 닫는 그림을. 비가 그치고, 가로등이 꺼지고, 십 년을 갇혀 있던 관이 마침내 빛 쪽으로 걸어 나오는 골목. 그리고 그 골목 끝에, 한 사람을 더 그려 넣었다. 자기 자신을.
관 씨. 이 그림의 값은 나예요. 남은 우물이 나밖에 없어서. 어머니도, 살아온 자리도, 그 사람도― 이미 다 나갔어요. 계산은 끝났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고 갈게요.
…나는 십 년을 그 계산에서 도망쳤다. 마지막 우물이 나 자신이라는 걸 알고도, 나만은 못 내놓겠더군. 골목은 안 낸 값을 없던 걸로 해 주지 않는다. 버티면, 값 대신 사람을 붙잡아 둔다. 그래서 나는 텅 빈 채로 내가 그린 세계에 남아, 다음 사람을 기다리는 관람자가 된 거다. 너는 피하려고 들지 마라. 이건― 정말 마지막 자리다.
진심을, 남김없이 담았다. 더 아낄 기억도 없었으니까. 한 방울, 눈물이 화면 위로 떨어졌다. 펜이 마지막 선을 긋는 순간, 세상이 크게 출렁였다. 빗속에서 늙은 관이 고개를 들었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텅 빈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안도였다. 그는 빛 속으로 풀어지듯 사라졌다. 골목 밖으로. 마침내.
골목이 닫히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듯, 천천히. 창밖엔 이제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시우는 자기가 그린 마지막 칸 속에서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펜의 무게, 식은 커피의 맛, 새벽의 푸른 빛, 누군가의 빠르고 밝은 목소리, 등에 얹힌 손의 온기. 손목의 흰 자국 다섯 개가, 그 순간 처음으로 저릿하게 아팠다. 골목이 그를 잡고 있던 자리였다. 마지막으로 사라진 건, ‘시우’라는 그 두 글자였다.
빈 방에, 펜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작가님?”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책상 위엔― 다이어리 두 권만이, 약속처럼 남아 있었다.
창밖의 비는 아직 다 그치지 않았다. 빗소리가 잦아드는 중이었고, 가로등은 꺼지는 중이었다. 골목은 아직― 마지막 한 뼘이, 닫히고 있었다.
하리는 두 권 중 낡은 것을 집어 들었다. 앞표지를 열면 톱니 자국. 그리고 십수 년째 비어 있던 첫 장. 그녀는 거기에 펜을 댔다.
열두 살 이후로 그녀가 종이에 쓴 것은 전부 기록이었다. 나중에 맞춰보려고, 틀리지 않으려고 쓰는 것. 이건 기록이 아니었다. 이건 그를 부르는 말이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시우예요.」 한 줄을, 그녀는 마음을 다해 끝까지 썼다.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손 밑에서 종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리는 옆에 펼쳐 둔 다른 권을 봤다. 맨 윗줄부터, 글자가 한 줄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잉크가 마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인 적 없는 종이가 되는 쪽으로. 한 줄. 또 한 줄. 6월 13일. 6월 14일. 그를 적어온 밤들이 위에서부터 차례로 매끈해졌다.
값이었다. 그 한 줄의 진심을 그녀는 열두 살 이후 종이에 적어온 모든 것에서 길어 올렸다. 그를 적어온 밤들도, 그 전의 십수 년도― 사라지는 걸 못 견뎌 손으로 붙들어 둔 것이라는 점에서 전부 한 우물이었다. 골목은 그 우물을 통째로 가져갔다. 하리는 펜을 대기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넷째 줄을 적어 넣은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펜이 한 번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지워지는 종이를 보면서 계속 썼다. 새벽에 작업하는 웹툰 작가. 식은 커피를 좋아하고, 마감을 무서워하면서도 끝까지 그리는 사람. 그리고― 방금 아주 용감한 일을 해낸 사람. 옆에서는 그를 적어온 밤들이 한 줄씩 사라지고 있었고, 그녀의 손끝에서는 한 사람이 한 줄씩 다시 지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 권의 맨 끝장에,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붙이고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펜을 놓았다.
그때 빗소리가 멎었다. 가로등이 꺼졌다. 골목이 닫혔다. 저주의 고리가 끊겼고, 그를 갉아먹던 것도 함께 닫혔다. 값은 첫 줄에서 이미 다 나갔다. 그를 적어온 밤들이 그 한 줄에 실려 통째로 나갔으니, 그 뒤로 쓴 문장들에는 길어 올릴 우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문장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하리는 백지가 된 두 권을 책상 위에 나란히 놓고, 첫 장을 펼쳐 두었다. 창밖이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