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시, 첫 컷
한 청년이 방바닥에서 눈을 떴다. 옷이, 비에 젖어 있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 방도, 손에 익은 듯 낯선 펜도, 전부 처음 같았다. 머릿속은 갓 닦아낸 칠판처럼 하얬다. 다만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큰일을 끝낸 사람처럼. 그리고 책상 위엔 다이어리 두 권이, 한 권은 첫 장이 펼쳐진 채로― 꼭 그를 기다려 온 것처럼 놓여 있었다.
첫 장에― 뜯겨 나간 자리 바로 다음 장에, 또박또박한 글씨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시우예요. 새벽에 작업하는 웹툰 작가. 식은 커피를 좋아하고, 마감을 무서워하면서도 끝까지 그리는 사람. 그리고― 당신은 방금, 아주 용감한 일을 해냈어요. 누군가를 구하고, 나쁜 고리를 끊었어요.」
그는 홀린 듯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두 번째 장은 백지였다. 그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넘기고 넘겨도 하얬다. 두 번째 권도 마찬가지였다. 두 권을 채웠을 종이가, 한 글자도 없이. 손끝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났다.
두 번째 권의 마지막 장엔, 한 여자애의 사진과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제 이름은 하리예요. 당신의 첫 독자. 오늘 아침에,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이번엔 아무것도 안 잃는 걸로.」
그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그 두 장이 전부였다. 모르는 이야기인데, 읽어 내려갈수록 가슴 한복판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어떤 문장에선 까닭 없이 코끝이 시큰했다. 머리는 기억 못 해도, 몸이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다이어리를 가슴에 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창밖엔 비가 말끔히 그쳐 있었고, 가로등 아래엔 아무도 없었다. 그냥, 평범하고 환한 아침이었다. 젖어 있는 건, 그의 옷뿐이었다.
그는 문을 열었다. 검은 단발의 여자애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사진 속 그 애였다.
하리는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왼손을 잡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엔 아무것도 없었다. 흰 자국도, 띠도. 거기에 엄지를 대 보고 나서야 그녀는 숨을 뱉었다.
…거기, 왜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이제 없네요.
…안녕하세요. 저, 시우… 라고 하는 것 같아요. 여기, 그렇게 적혀 있어서.
네. 맞아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작가님. 정말, 정말 반가워요.
그는 다이어리를 펼쳐, 하얗게 비어 버린 가운데를 그 애에게 보여줬다. 하리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그가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그 애는 그의 얼굴만 봤다. 어젯밤 그 글자들이 한 줄씩 빠져나가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의 눈이었다.
알아요. 어젯밤에 봤어요. …제가 낸 값이에요.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하리도 설명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거기 있던 건 다 제 머릿속에 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적으면 돼요.
사라진 이야기는, 누군가 기억해 주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날 시우는, 하리가 옆에 앉은 채로, 다이어리의 빈 페이지에 첫 컷을 그렸다. 이번엔, 아무것도 잃지 않는 그림을.
펜을 놓았을 때,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리의 이름도, 방금 마신 커피의 맛도, 전부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그린 골목에 누군가 서 있었다」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