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제 이름으로
강 상무의 치부가 담겼다는 물건 — 엄지손톱만 한 그것이 지원의 손안에 있었다. 조금 전 도현의 손에서 옮겨 쥔 뒤로, 그녀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쓸 생각도, 파기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쥐고 있었다.
도현은 계단실 문 앞에서 물러나 있었다. 저 아래 어둠 위로 그것을 던지려던 손이 빈 채로 내려가 있었다.
"이건 이 대리 카드가 아니에요." 지원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걸로 이 대리를 지키는 건, 3년 전에 이 대리가 한 짓을 한 번 더 시키는 거예요. 남 대신 짐 지는 거."
"그러면 팀장님이 끝나요."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 조금 전 했던 말을, 한 번 더.
"그건 내가 정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이 대리가 정할 게 아니라."
도현이 그녀를 봤다. 랜턴은 이제 붉은 실선 하나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 다 알았다. 이제 이 층에 감출 게 남지 않았다는 걸. 그 실수가 누구 것이었는지도, 누가 알고도 덮었는지도, 누가 살아남으려고 눈을 감았는지도 — 이 밤이 한 겹씩 다 벗겨 놓은 뒤였다. 남은 건 그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하나였다.
그때 지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손끝이 식었다. 강민석. 4퍼센트. 이 시각에, 이 배터리로.
받을까 말까 하는 사이 도현도 그 이름을 봤다. 그의 얼굴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눈이 한 번 가라앉았다.
지원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상무님."
"안 자고 있었네." 강 상무의 목소리에는 새벽인데도 잠기운이 없었다. 늘 그렇듯 서두르지 않았다. "건물에 갇혔다며. 고생이 많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 사람은 늘 알았다.
"내일 아침 명단, 그대로 올라가는 거 확인차 전화했어." 강 상무가 말했다. "밤새 마음 약해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서 팀장은 그럴 사람 아니지."
"…상무님."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부드러워서 더 서늘한, 3년 전 그 방에서와 똑같은 어조였다. "이번 개편에 기획본부장 자리가 하나 비어. 위에서 서 팀장 이름이 나왔어. 내가 밀었고." 잠깐의 침묵. "지난 3년, 입 무거웠던 거. 나는 그런 사람한테 자리를 주는 사람이야."
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푹 자고, 아침에 봐." 강 상무가 말했다. "그 층, 곧 물 빠질 거야. 사람 넣으라고 해뒀어."
전화가 끊겼다.
지원은 어두운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침묵의 대가가 방금 숫자와 직함으로 환산되어 도착했다. 3년 전에는 종이 한 장이었고, 오늘 새벽에는 본부장 자리였다. 값이 오른 것뿐, 사려는 물건은 같았다. 그녀의 입.
"…본부장." 어둠 속에서 도현이 말했다. 비웃음도, 놀람도 없었다. "그 사람, 사람 다루는 건 참 잘하죠. 3년 전에도, 지금도."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옳아서였다.
랜턴이 마침내 꺼졌다. 붉은 비상등만 남아 층을 다시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 붉은빛 속에서 지원은 눈을 감았다. 감은 어둠 뒤로, 형광등이 하얗게 밝던 3년 전 어느 아침이 떠올랐다.
보고서를 든 손이 강 상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밤을 꼬박 샌 아침이었다. '책임자' 칸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녀의 글씨가 아니라 — 도현이 스스로 적어 넣은, 자기 이름.
전날 밤, 도현이 그 만년필을 집어 제 이름을 쓸 때 지원은 막지 않았다. 딱 한 번 "이 대리"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도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팀장님이 여기서 무너지면 팀 전부가 강 상무한테 먹혀요. 저 하나 빠지는 걸로 끝나면, 그게 제일 싸게 막는 거고요." 그러곤 이름 아래 획을 마저 그었다.
그 순간 지원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 검수 단계, 아무도 안 보던 소수점 한 자리를 놓친 게 도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도현이 뒤집어쓰겠다고 나선 그 실수의 진짜 임자가 누구인지, 그 방에서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고 — 그중 하나가 지금 대신 이름을 적고 있었다.
지원은 그때 말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실수라고. 만년필을 뺏어 그 이름을 긋고 자기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무너지면 안 됐으니까. 3년을 쌓은 자리가, 그 자리에 오르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여기서 끝나면 안 됐으니까. 도현이 내민 손을 잡은 건 협박당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그녀는 살고 싶었고,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건 선택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는 그 보고서를 들고 문을 열었다. 도현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강 상무는 그것을 내려다보고, 웃지 않는 눈으로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서 팀장."
그 한마디가 3년 동안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물소리가 낮아지고 있었다.
도현이 먼저 알아챘다. "물 빠지네요." 그가 계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셔터 열릴 거예요."
얼마 뒤 발밑에서 둔한 진동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엔 무언가 물러앉는 소리가 아니라 되살아나는 소리였다. 저 아래서 배수 펌프가 돌기 시작했고, 한 박자 늦게 천장 형광등이 깜빡이며 돌아왔다. 붉은 비상등이 꺼졌다. 여덟 시간 만에, 층에서 핏빛이 걷혔다.
창밖은 아직 어스름했다. 비가 그친 하늘이 회색으로 트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처음으로 붉은빛이 아닌 맨 빛 속에 드러났다. 서로 밤새 얼마나 지쳤는지가 그제야 다 보였다.
멀리서 셔터가 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밤새 두 사람을 가둔 문이 열리고 있었다.
도현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반쯤 싼 채로 밤을 난 그 상자를.
"먼저 내려가세요, 팀장님." 그가 말했다. "저는 이거 마저 챙겨서."
"이 대리." 지원이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지원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전기가 돌아온 모니터가 켜지고, 아침 9시에 게시될 그 파일이 다시 화면에 떴다. 명단 맨 아래, 이도현.
그녀는 그 이름 위에 커서를 올렸다. 1화의 그 밤처럼. 다만 이번엔 손이 망설이지 않았다.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새 문서를 열었다. 수신은 이사회 감사위원회. 그녀에게는 3년 내내 지우지 못하고 보관해 온 것들이 있었다. 그때의 회의록, 강 상무가 실무선에 책임을 씌우라고 지시하던 정황, 도현의 이름이 어떻게 그 빈칸에 들어갔는지 —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실수의 진짜 임자가 누구였는지.
그녀는 자기 이름으로 그것을 썼다. 도현의 물건은 열어 보지도 않았다. 판을 뒤집는 건 그의 카드가 아니라 그녀의 자백이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3년 전에 진 짐을, 그녀가 이제야 제 등으로 옮겨 오는 것이 됐다.
마지막에 그녀는 사직서를 첨부했다. 자리를 지키려고 눈감았던 사람이, 그 자리를 걸고 눈을 뜨는 것 말고는 이 자백을 진짜로 만들 방법이 없었다.
전송 버튼 위에서 손이 한 번 멎었다. 3년 전 만년필 앞에서 멎었던 그 손이었다. 그때는 끝내 진실을 쓰지 못했다.
이번엔 눌렀다.
"팀장님."
등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자를 안은 채, 그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밤새 지켜 온 담담함이 처음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뭐 하신 거예요." 그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설마—"
"이미 갔어요." 지원이 말했다. 화면에는 '전송 완료'가 떠 있었다.
도현이 성큼 다가왔다. 처음으로, 그가 서두르고 있었다. "되돌려요. 아직 아침도 안 됐잖아요. 감사위원회 열리려면—"
"이 대리." 지원이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3년 전에, 그 방에서, 이 대리가 내 대신 이름 적을 때. 나 그거 막을 수 있었어요. 안 막았고요."
도현이 멈췄다.
"이번엔 이 대리가 못 막아요." 지원이 그를 봤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피하지 않고. "미안해요. 이건 내가 정할 거예요."
창밖에서 회색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저 아래 거리에서, 밤새 잠긴 건물로 들어서는 첫 발소리들이 열린 셔터 너머로 울렸다. 9시까지,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세 시간 뒤 게시판에 걸리는 건, 이제 이도현의 이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