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빈칸에 쓴 이름
새벽 3시를 넘겼다.
물병은 비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은 벌써 오래전에 지원의 목을 지나갔고, 빈 병만 랜턴 옆에 모로 누워 빛을 한쪽으로만 받았다. 휴대폰은 5퍼센트에서 더 내려가지 않으려는 듯 화면을 꺼 캄캄했다. 계단실 너머로 물 빠지는 소리가 아까보다 얕았다. 새벽이 오고 있다는 유일한 신호였다. 아침 9시까지, 이제 대여섯 시간.
지원은 그 시간을 세지 못했다. 방금 이 어둠 속에 내려앉은 것 하나가, 다른 모든 시계를 멈춰 세웠으니까.
3년 전 그 경위서의 빈칸에 올라간 이름. 도현이 뒤집어쓴 잘못이 실은 누구의 손에서 시작됐는지 — 이제 두 사람 사이에 그건 감출 수 없는 사실로 놓여 있었다. 3년을 눈감아 온 것이 방금 눈꺼풀을 걷어 올렸고, 걷힌 자리로 들어온 빛이 너무 밝아 지원은 차라리 눈이 아팠다.
"이 대리." 지원의 목소리가 어둠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하나만 물을게요."
"네."
"그때… 그 이름 쓸 때." 그녀는 한 번 삼켰다. "이 대리는, 그게 누구 잘못인지 몰랐던 거예요? 아니면—"
말끝이 저 혼자 무너졌다. 그 뒤에 올 말이 무서워서.
도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랜턴 심지 끝을 오래 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층이 조용해졌다. 빗소리마저 잠깐 물러난 것 같았다.
"…뭘." 지원이 겨우 물었다. 몇 시간 전, 같은 물음이 같은 무게로 되돌아왔다.
"팀장님 잘못이라는 거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경위서 받아 든 날,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느 칸이 왜 틀어졌는지. 누구 손에서 그게 시작됐는지."
지원은 숨 쉬는 법을 잠깐 잊었다.
3년 동안 그녀는 자기가 그를 속였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죄를 떠넘기고, 그 무지 위에 자기 자리를 지었다고. 그 죄책감이 무거웠지만, 적어도 그건 그녀 혼자 지는 무게였다. 그런데 방금 그 바닥이 빠졌다. 그는 알았다. 알면서 자기 이름을 썼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가 그에게 저지른 일이 아니라, 그가 그녀를 위해 택한 일이었다. 그 사실이 죄책감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
"왜." 지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그랬어요. 알았으면… 알았으면 그건 이 대리가 나설 일이 아니잖아요."
"나서는 게 아니면요." 도현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때 팀장님이 무너지면, 그다음이 어떻게 되는지 저는 알았거든요."
경위서에 올릴 이름을 정해 오라던 강 상무의 말이 회의실에 남은 지 하루가 지난 밤이었다.
형광등은 여전히 하얗게 밝았지만, 그 밑에 앉은 두 사람의 얼굴은 낮보다 어두웠다. 지원 앞에 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책임자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도현이 검수 기록 한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낮에 그가 다시 뽑아 온 것이었다.
"팀장님." 그가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낮았다. "저 이거 몇 번을 다시 봤는데요."
지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발주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항목 승인한 결재선." 도현이 종이의 한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짚은 자리에서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여기, 팀장님 도장이에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원은 이미 알고 있던 줄이었다. 나흘 전, 현장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그 도장이 자기 것임을 알았다. 누구보다 먼저 알았고, 그래서 누구보다 오래 그 종이를 피해 다녔다.
"…알아요." 지원이 겨우 말했다. "내가 승인했어요. 이 대리가 두 번이나 짚었잖아요. 등급이 안 맞는다고. 그런데 내가 그 대조표를 덮었어요. 납기 안에 넘겨야 한다고, 알면서 그냥 가자고 했어요."
"팀장님." 도현이 말을 잘랐다.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말, 저 말고 다른 데서는 하지 마세요."
지원이 그를 봤다.
"이거 강 상무님한테 그대로 올라가면요." 도현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듯이. "팀장님 하나로 안 끝나요. 팀장이 사고 냈다고 정리되면, 그 위에서 이 팀을 통째로 정리할 명분이 생겨요. 3년 공들인 거, 팀원들 자리, 다 같이 쓸려 나가요. 강 상무님은 그걸 기다리고 있고요."
"…"
"근데 실무자 하나가 검토 단계에서 놓친 걸로 정리되면." 도현이 종이의 빈칸을 봤다. "그건 그 사람 하나 걸고 끝나요. 팀은 살고."
지원은 그 '실무자 하나'가 지금 자기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이 대리."
"팀장님이 쓰실 순 없잖아요."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팀장님 이름이 거기 올라가는 순간 이 판 전부가 무너지는데."
그가 만년필을 집었다. 강 상무가 두고 간, 그 소리 없는 만년필을.
"제가 제일 늦게까지 남는 사람이라." 도현이 옅게 웃었다. 그 밤엔 아직 미소 끝이 쓸쓸하지 않았다. "검토 단계에서 놓쳤다고 하면, 제일 그럴듯한 게 저예요. 마지막까지 서류 붙들고 있는 사람이니까."
지원은 그를 막아야 했다. 손을 뻗어 그 만년필을 빼앗아야 했다. 입을 열어 아니라고, 그건 내 것이라고 말해야 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도현이 빈칸에 자기 이름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지원은 그 손끝을 봤다. 막을 시간은 충분했다. 한 글자, 두 글자, 획과 획 사이마다 그녀가 끼어들 틈이 있었다. 그 틈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아니라고 하면 나는 이 자리에서 끝난다. 팀장 자리도, 여기까지 온 3년도, 그다음도 전부. 그리고 저 사람은 어차피 자기가 쓰겠다고 하잖아. 내가 말리지 않은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자원한 거야.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면서 그 거짓말을 골랐다.
도현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빈칸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거기엔 그의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을 그 자리에 남겨 둔 건 그가 쓴 손이 아니라 지원이 다물어 버린 입이었다.
"…고마워요." 지원이 말했다. 그 두 글자가 평생 그녀를 따라다닐 걸, 말하는 순간 알았다.
"고맙다고 했어요, 그때." 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랜턴 불빛이 그 떨림을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았다. "말릴 수 있었는데. 시간도 충분했는데. 나는 이 대리가 쓰는 걸 보고만 있었어요. 그게 사는 길이라서. 협박당한 것도 아니고, 속은 것도 아니에요. 내가 골랐어요. 내 자리 지키려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 말을 소리 내어 했다. 3년 동안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렇게까지 또렷하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그러니까 이 대리." 지원이 그를 봤다. 이번엔 시선을 비끼지 않았다. "이 대리는 나 대신 죄를 쓴 게 아니에요. 나는 이 대리 뒤에 숨은 거예요. 그건 달라요."
도현은 한참 그녀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후회 안 해요." 그가 말했다. "그때도, 지금도."
"어떻게—"
"팀이 살았잖아요." 도현이 무심히 말했다. "그거면 됐어요. 저는."
그 무욕이, 지원을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그는 3년을 낙인 속에서 살고도 그것을 손해로 세지 않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그녀의 '고마워요'는 더욱 값싸졌다.
도현이 잠깐 말이 없더니,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를 꺼내 랜턴 불빛 아래 올려놓았다. 엄지손톱만 한, 검은 USB였다.
"이건." 지원이 물었다.
"그때 뒤처리하면서요." 도현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경위서 말고도 정리할 게 많았어요. 협력사 정산이며, 예산 집행이며. 그 서류들 넘기다가… 넘어가지 말았어야 할 게 하나 딸려 왔어요."
지원의 눈이 그 작은 물건에 붙박였다.
"강 상무님이 그 프로젝트 단가를 왜 그렇게 무리하게 당겼는지." 도현이 말했다. "어디로 뭐가 빠졌는지. 정황이지만, 시작점으로는 충분해요."
3년이었다. 도현은 3년 동안 이걸 쥐고 있었다. 자기를 낙인찍은 사람의 목을 조를 수 있는 것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럼 왜." 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안 썼어요. 이거 하나면, 이 대리는—"
"쓸 수도 있었죠." 도현이 그 USB를 손안에 감아쥐었다. "몇 번 생각했어요. 이걸 터뜨리면 강 상무님이 어떻게 되는지. 저한테 씌운 게 어떻게 벗겨지는지." 그가 옅게 웃었다. 미소 끝이 쓸쓸했다. "근데요, 팀장님. 저는 그렇게 남고 싶진 않았어요."
"…"
"복수해서 이긴 사람. 그 사람 무너뜨리고 제 자리 되찾은 사람."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기억되는 거, 낙인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더라고요. 저는 그냥… 조용히 나가고 싶었어요. 3년이면 됐어요."
그가 랜턴을 지나 계단실 쪽으로 걸었다. 물 빠지는 소리가 나는 어둠 쪽으로.
"이 대리?"
"물이 다 안 빠졌어도, 이거 하나 던질 정도는 돼요." 도현이 계단실 문 앞에 섰다. USB를 쥔 손을 발밑 어둠 위로 들었다. "이게 없어지면 저도, 팀장님도 이걸로 뭘 할 일이 없어져요. 그게 나아요. 서로."
지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그가 저것을 물에 버리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강 상무를 끌어내릴 유일한 물증이 이 건물 지하의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는 것.
그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안 돼요!"
지원은 어둠을 가로질러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USB를 쥔, 그 손목을.
두 사람이 계단실 문 앞에서 멎었다. 발밑으로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도현의 손목은 차가웠고, 맥이 빠르게 뛰었다. 담담한 얼굴 밑에서 이 사람도 실은 이렇게 뛰고 있었다는 걸, 지원은 그 손목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대리."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랜턴이 등 뒤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문에 길게 붙였다. "이거 버리면… 이 대리 3년은 그냥 3년으로 끝나요.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건 안 돼요."
"팀장님까지 끌고 들어갈 순 없어요." 도현이 손목을 빼려 했다. "이거 쓰면 그 경위서도 다시 열려요. 그럼 팀장님 도장이 나와요. 저는 그거 보려고 3년 참은 게 아니에요."
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 도현의 카드로 도현을 지키는 건 — 3년 전 그가 자기 이름을 빈칸에 써 넣던 그 밤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도 그는 그녀를 지키려 자기를 지웠고, 지금도 그러려 하고 있었다. 이걸 그가 버리게 두면,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뒤에 숨는 것이었다. 두 번은 안 됐다.
"버리지 마요." 지원이 말했다. 손목을 쥔 손이 떨렸지만 놓지 않았다. "이거… 이 대리가 쓸 필요 없어요."
"그럼—"
"내가 할게요."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 "이 대리 물건으로 이 대리 지키는 거 말고. 내 입으로, 내 이름으로."
도현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무언가를 마주한 얼굴이었다.
"3년 전에 내가 다물었던 입." 지원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단단해졌다. "그거 이번엔 내가 열게요. 강 상무님이 뭘 덮었는지, 내가 뭘 눈감았는지. 전부."
계단실 저 아래에서 물이 마지막으로 한 뼘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새벽이, 아침 9시가, 그 명단이 걸릴 시각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도현은 그녀의 손에 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3년 만에 처음으로 담담함이 완전히 벗겨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팀장님이 끝나요."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목을 놓고, 그 손을 펴, USB를 자기 손바닥으로 옮겨 쥐었다. 작고 차가운 그것이 그녀의 손안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것은 도현의 카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쓸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아침에 꺼낼 것은 이 검은 플라스틱 조각이 아니라, 3년을 삼켜 온 자기 자신의 말이었다.
창밖에서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어둠의 끝이 아주 옅게,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