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KOEN
← 비상등만 켜진 층

7화. 그냥 가자고

물은 없었다.

빈 병이 랜턴 옆에 세워져 있었다. 지원은 아까부터 그 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했다. 뭐라도 쥐고 있어야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휴대폰은 팔 퍼센트였다. 화면을 켤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깎여 나가서,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는 일마저 아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새벽 세 시가 가까웠다. 아침 아홉 시까지, 물이 빠질 동틀 녘까지, 아직 건너야 할 어둠이 길었다.

건너편에서 도현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눈은 감았지만 자는 게 아니었다. 계단실 쪽 물소리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잘려 나갈 사람이, 자기를 자른 사람과 함께, 이 층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다.

"이 대리." 지원이 불렀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얇게 갈라졌다.

"네." 도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까 하려던 말." 그녀는 빈 병을 쥔 손에 힘을 줬다. "3년 전, 그 검수 건요."

도현의 눈꺼풀이 한 번 움직였다.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마치 그 이야기가 나올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사람처럼.

"그건 이제 됐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지난 일이에요."

"안 지났어요." 지원의 말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나한테는 하루도 안 지났어."

층이 조용해졌다. 빗소리와, 계단 아래에서 물이 낮게 차오르는 소리뿐이었다. 지원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기가 왜 3년 동안 이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받지 못해 왔는지를 생각했다. 죄책감이라고, 그녀는 오래 그렇게 불러 왔다. 하지만 죄책감은 정확한 이름이 아니었다. 죄책감은 잘못을 저지른 자리에서 자라는 것이고 — 그녀가 눈을 못 두는 건, 잘못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녀 혼자만 알기 때문이었다.

랜턴 불빛이 한 번 낮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따라, 지원의 기억이 다시 뒤로 끌려갔다. 붉은 비상등이 켜질 일 없던, 형광등이 하얗게 밝던 어느 늦은 저녁으로.

서지원
서지원 안 지났어요. 나한테는 하루도 안 지났어.

붕괴가 나기 두 주 전이었다.

그날의 사무실엔 아직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무너질 것의 냄새는 무너진 뒤에야 맡아지는 법이니까. 형광등은 환했고, 지원의 책상엔 협력사에서 넘어온 자재 검수 대조표가 펼쳐져 있었다. 납기가 열흘 앞이었다. 강 상무가 그 주 내내 "일정 밀리면 그다음은 각자 알아서"라는 말을 회의마다 흘리고 다니던 때였다.

"팀장님." 도현이 서류 한 장을 들고 왔다. 넥타이가 반듯했고, 얼굴엔 아직 그늘이 없었다. 밤을 새워도 눈빛이 지치지 않던, 낙인 전의 얼굴이었다. "검수표에서 하나가 안 맞아요."

"뭐가요." 지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재 등급이요." 그가 대조표의 한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발주서에는 이 등급으로 들어갔는데, 현장 검수 기록에는 그 항목이 아예 비어 있어요. 확인을 안 했거나, 다른 걸 받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지원은 그제야 화면에서 눈을 뗐다. 도현이 짚은 자리를 봤다. 빈칸. 검수자 서명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시 검수하면 며칠 걸려요?"

"자재 다시 받아서 하면… 나흘, 닷새요." 도현이 대답했다. "납기는 넘길 거예요. 근데 팀장님, 이거 안 잡고 가면—"

"알아요." 지원이 말을 잘랐다. 그녀는 그 등급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현보다 먼저 알았다. 하중을 견디는 부재였다. 한 등급 낮은 게 들어갔다면, 설계가 계산한 여유가 그만큼 깎였다는 뜻이었다. 알았다.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강 상무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일정 밀리면 그다음은 각자 알아서. 지원은 열흘 뒤의 납기를 봤고, 그 납기를 못 맞췄을 때 무너질 것들을 봤다. 팀. 3년. 자기 자리. 그 무게가, 눈앞의 빈칸 하나보다 컸다.

"등급 차이라고 다 문제 되는 건 아니에요." 지원이 말했다.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안전율 안에 들어올 수도 있어. 현장에서 이 정도는 늘 있는 오차고."

"그건 계산을 다시 해 봐야—"

서지원·이도현
서지원·이도현 검수표에서 하나가 안 맞아요.

"이 대리." 지원은 대조표를 덮었다.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눌러 덮었다. "그냥 가자."

도현이 그녀를 봤다.

"납기 못 맞추면 이 판 통째로 흔들려요. 그럼 우리 팀부터 날아가."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차분해서 더 단단했다. "내가 책임질게. 검수 건은 내가 안고 갈 테니까, 발주 그대로 진행해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지원은 자기가 무엇을 넘었는지 알았다. 알면서 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넘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강 상무는 회의실에서 말만 흘렸을 뿐, 그 빈칸을 덮은 손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도현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반듯한 얼굴로 서류를 접었다.

"팀장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괜찮은 거겠죠." 그가 옅게 웃었다. 그늘 없는 웃음이었다. "제가 팀장님 판단 못 믿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 신뢰가, 3년 뒤에 칼이 될 줄을 그때의 지원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어렴풋이 알았다. 다만 알고도, 열흘 뒤의 납기를 위해 그 앎을 접어 서랍에 넣었을 뿐이었다.

도현이 서류를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답게, 그날 밤도 그는 오래 불을 켜 두고 있었다. 지원은 덮어 둔 대조표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 그 서랍을 다시 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주 뒤, 현장에서 부재 하나가 주저앉았다.

"팀장님." 도현의 목소리가 어둠을 건너왔다. "숨소리가 이상해요. 괜찮으세요?"

지원은 자기가 언제부터 숨을 얕게 쉬고 있었는지 몰랐다. 빈 병을 쥔 손이 축축했다. 그녀는 그 병을 내려놓고, 무릎에 두 손을 얹었다. 이제 쥘 것이 없으니 손이 그대로 떨렸다.

"3년 전에." 그녀가 입을 뗐다. "그 검수 건. 이 대리가 나한테 가져왔었죠. 자재 등급 안 맞는다고."

도현이 벽에서 등을 뗐다. 처음으로.

이도현
이도현 잘려 나갈 사람이, 자기를 자른 사람과 함께, 이 층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다.

"기억나요?" 지원이 물었다.

"…기억나요." 그가 천천히 답했다.

"이 대리는 그때, 그거 안 잡고 가면 안 된다고 했어. 나흘이면 다시 검수한다고. 납기 넘겨도 잡아야 한다고." 지원의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3년을 서랍에 넣어 둔 것이, 열쇠 없이 저절로 열리고 있었다. "그거, 이 대리 잘못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팀장님—"

"내가 덮었어요." 지원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3년 만에 처음으로 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했다. "그냥 가자고. 내가 그랬어. 이 대리가 두 번이나 짚었는데, 내가 대조표를 덮고 서랍에 넣었어요. 납기 때문에. 팀 날아갈까 봐. 내 자리 흔들릴까 봐."

말을 끝내고, 지원은 도현의 얼굴을 봤다. 이번엔 비껴 두지 않고, 다시 정면으로. 몇 시간 전 겨우 되찾은 그 얼굴을, 이번엔 자백의 끝에서.

그녀는 그가 놀라기를 기다렸다. 화내기를, 벽을 치기를, 3년 치 원망을 이 밤에 쏟아 내기를. 그러면 차라리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망은 갚을 방법이라도 있으니까.

그런데 도현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랜턴 불빛 아래에서, 그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래전에 다 알고, 오래 안고, 이미 어딘가에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랜턴 옆의 빈 물병을 소리 없이 바로 세웠다. 그 담담한 손짓이, 지원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이 대리." 지원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왜… 왜 하나도 안 놀라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층이 조용했다. 빗소리와, 계단 아래에서 물이 차오르는 낮은 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