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제 이름을 쓰세요
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랜턴 불빛이 그의 얼굴 위에서 천천히 기울었다. 조금 전까지 그 얼굴을 덮고 있던 담담함이, 지금은 아주 얇게 금이 간 유리 같았다. 어디를 건드리면 어느 쪽으로 갈라질지 알 수 없는.
"…보고서가 왜요." 마침내 도현이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지원은 손안의 빈 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물은 아까 그 한 모금으로 끝이었다. 병이 가벼웠다. 밤을 버티게 해 줄 것들의 목록에서 그것 하나가 방금 빠졌다.
"그 보고서에," 그녀가 입을 뗐다. 목이 말랐다. "이 대리 이름이 올라간 거요."
도현의 눈이 랜턴에서 그녀에게로 옮겨 왔다.
"그거 내가," 지원은 3년 동안 삼켜 온 문장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꺼냈다.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팀장님이 쓴 거 아니에요." 도현이 말을 잘랐다.
자기 죄를 자기 것이라 못 박으려, 나무람도 망설임도 없이 그가 이렇게 그녀의 말허리를 끊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원은 그를 봤다.
"그 이름,"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 "제가 썼어요. 그 만년필로, 제 손으로."
층의 어둠이 한 뼘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지원은 그 사실을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은 전혀 다른 무게로 어깨 위에 떨어졌다.
랜턴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따라, 그녀는 다시 그 밤으로 끌려갔다.
강 상무가 방을 나가고도, 지원은 그 한 장을 앞에 두고 오래 앉아 있었다. 블라인드 줄무늬가 탁자를 다 건너갈 때까지.
이윽고 그녀는 서류와 만년필을 집어 들고 그 방을 나왔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창밖은 오후가 저녁으로 기울고 있었고, 하나둘 자리가 비고 천장 형광등이 하얗게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그 한 장을 책상에 둔 채 앉아 있었다.
'책임자' 칸은 비어 있었다. 만년필은 뚜껑이 열린 채 그녀 손이 닿기를 기다렸다. 사무실엔 자기 말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팀장님, 아직 계셨네요."
지원은 서류를 뒤집을 새도 없었다. 도현이 파티션 너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날도 그는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었다. 서류 가방을 든 채, 불 꺼진 자리들 사이를 지나서.
"…이 대리." 지원은 만년필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늦었다. 그의 시선이 이미 탁자 위 서류에 가 닿아 있었다.
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오래 실무를 본 사람이었다. 사고 원인 보고서, 비어 있는 책임자 칸, 뚜껑 열린 만년필 — 그 세 가지를 잇는 데 그에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거," 그가 천천히 말했다. "누구 이름 하나 들어가야 닫히는 거죠."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곧 대답이었다.
"제 이름 쓰세요."
지원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요."
"제 이름 쓰시라고요."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밤이 아니라 그 밤, 몇 시간 전 이 층에서 물이나 좀 드시라고 하던 때와 같은 어조로. "도면 검토 단계에서 놓친 걸로 정리한다면서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저도 되잖아요."
"이 대리." 지원의 목소리가 굳었다. "이건 이 대리 일이 아니에요."
"압니다."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더, 저여도 돼요."
지원은 그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자기 일이 아닌 걸 아는 사람이, 그래서 더 자기가 지겠다고 했다.
"팀장님 이름이 저 칸에 들어가면요." 도현이 서류를 내려다봤다. "팀장님 하나 끝나는 걸로 안 끝나요. 이 팀이 3년 쌓은 게 통째로 강 상무 밑으로 넘어가요. 남은 사람들도 다 그 밑에서 굴러야 하고. 저 하나 빠지는 거랑은 무게가 달라요."
"그럼 이 대리는." 지원이 물었다. "이 대리는 어떻게 되는데요."
도현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3년 뒤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게 될 침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저는," 그가 말했다. "그래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건 이유가 아니었다. 이유의 자리에 놓인, 이유처럼 생긴 무엇이었다. 지원은 그때 물었어야 했다. 왜 그래도 되느냐고. 무엇이 이 사람을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었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그 대답이 자기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어서.
도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 밑에 깔려 있던 만년필로.
지원은 그 손을 봤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그 손을 막을 수 있었다. 만년필을 자기 쪽으로 당겨, 그 빈칸에 자기 이름을 쓸 수도 있었다. 한 획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손을 치웠다.
도현이 만년필을 집었다. 서류를 제 쪽으로 돌리고, 책임자 칸에 이름 석 자를 적었다. 망설임 없이. 이도현. 잉크가 종이에 스미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지원은 그걸 지켜봤다. 막지 않는 것으로, 그녀는 그 밤 자기 몫의 이름을 대신 썼다.
"그러니까 팀장님 잘못 아니에요." 도현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 어둠에서 끌어냈다. "그날, 제가 정한 거예요. 팀장님은 그냥… 거기 계셨을 뿐이고."
거기 계셨을 뿐.
지원은 그 말을 3년째 자기 자신에게 되뇌어 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도장을 찍는 자리에, 서류를 넘기는 자리에. 그런데 그 말을 도현의 입으로 들으니, 위로가 아니라 판결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고, 용서받을수록 그녀는 더 선명하게 유죄였다.
지원의 어깨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3년을 꼿꼿하게 버텨 온 자세가, 랜턴 불빛 아래에서 한 번 접혔다.
"…내가 막았어야죠."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손. 그때 그 만년필. 내가 뺏었어야 했는데."
"팀장님."
"3년이에요, 이 대리." 지원은 얼굴을 손으로 눌렀다. "3년 동안 이 대리는 그 이름표를 달고 살았고, 나는 그걸 알면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 방에 다시 들어가서 종이를 바꾸자는 말을 못 했어요. 이 대리가 자리에서 밀려나는 걸 보면서도. 오늘 밤에도. 이 대리가 상자에 짐을 담는 걸 보면서도."
휴대폰 화면이 저 혼자 켜졌다 꺼졌다. 배터리 경고였다. 9퍼센트. 창밖 빗소리는 여전했고, 물이 빠질 새벽은 아직 멀었다. 이 층에 갇힌 지 다섯 시간, 아침 9시까지는 그보다 더 남아 있었다. 줄어드는 것들의 목록에, 이제 그녀가 3년을 세워 둔 마지막 방어선까지 올라 있었다.
도현은 한참 그녀를 봤다. 무너진 팀장을, 나무라지 않는 눈으로.
"막았으면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랬으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지원은 손을 내렸다.
그 질문의 답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때 자기 이름을 썼다면, 도현은 낙인 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건 분명했다. 그런데 도현은 왜, 자기 일도 아닌 일에 그토록 쉽게 손을 들었나.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말 뒤에, 그가 끝내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나.
3년을 미뤄 온 질문이, 마침내 그녀의 입 끝까지 올라왔다. 물으면 그 대답이 자기를 어디로 데려갈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밤엔,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더는 눈감고 싶지 않았다.
"이 대리."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사흘이 아니라 3년 만에. "하나만 물을게요."
도현의 눈이 랜턴 불빛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 질문이 무엇일지 이미 아는 사람처럼.
"왜 이 대리였어요." 지원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왜 내가 아니라, 이 대리였어요."
랜턴 심지가 타닥, 한 번 소리를 냈다.
도현은 오래, 아주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