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누군가는
"알아요. 며칠 됐어요."
그 말이 어둠 속에 내려앉은 뒤로, 두 사람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은 손안의 병뚜껑만 만지작거렸다. 몇 시간을 그녀는 그가 모른다는 가정 위에 앉아 있었다. 못 본 척한 상자, 목 안에서 삼킨 사과, 사흘째 돌리지 못한 얼굴 — 전부 그가 아직 모른다는 데 기대 있던 것들이었다. 그 바닥이 방금 빠졌다.
이제 이 층에 감출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조이던 것을 하나 풀었다. 숨을 곳이 사라지자 오히려 숨이 트였다.
지원은 그를 봤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명단 얘기요?" 도현은 랜턴 심지 끝을 보고 있었다. 밝기를 한 단 더 낮춘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 노랗게 남기고 나머지를 어둠에 내줬다. "감은 진작에요. 확실해진 건 사흘쯤 전이고요."
사흘. 지원은 그 숫자를 속으로 셌다. 그러니까 그는 사흘을 알고도, 매일 아침 제자리로 출근해서, 반쯤 짐을 싸 두고,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결재 서류를 올렸다는 뜻이었다. 그 사흘 동안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못했고, 그는 그런 그녀에게 매번 담담히 목례했다.
"그러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하면요." 도현이 그녀를 봤다. 나무라는 눈이 아니었다. "팀장님이 며칠 더 힘드셨겠죠."
지원의 손끝이 병뚜껑 위에서 멈췄다.
"사과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가 먼저 말했다.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그거 팀장님이 정한 거 아니잖아요. 회사가 정한 거고, 팀장님은 도장 찍는 자리에 계셨던 거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팀장님이라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이 대리." 지원의 말이 조금 빨랐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그 명단 맨 아래 그의 이름은 회사가 정한 게 아니라 누군가 파 놓은 자리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3년을 가라앉아 있던 더 오래된 빚이 그녀에게 따로 있다는 것. 그는 그 둘 다 모른 채, 그녀의 죄를 대신 덜어 주려 하고 있었다. 그 다정함이 지금은 벌처럼 아팠다.
지원은 책상 위 생수병을 집었다. 흔들자 바닥에서 얕은 소리가 났다. 두 모금이나 남았을까. 그녀는 뚜껑을 열어 그의 쪽으로 내밀었다.
"이 대리 마셔요."
"팀장님 드세요."
"오늘은 내 말 좀 들어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나도 한 번쯤은 남 챙기게."
도현이 잠깐 그녀를 봤다. 아까 물병을 건넬 때 자기가 했던 말이 되돌아온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그는 더 사양하지 않고 병을 받아 한 모금 넘겼다. 그게 지원이 이 밤에 처음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휴대폰 화면을 켜 보니 11퍼센트였다. 아침 9시까지, 그리고 물이 빠질 새벽까지 아직 멀었다. 줄어드는 것들 사이에서, 방금 그가 마신 한 모금만이 늘어난 쪽에 있었다.
"화 안 나요?" 지원이 물었다.
"뭐가요."
"이렇게 잘리는 거. 이 밤에, 하필 나랑 갇혀서, 물까지 나눠 마시면서." 그녀는 랜턴을 조금 옮겼다. 빛의 경계가 그의 눈가로 밀려갔다. "나 같으면 벽이라도 쳤을 거예요."
도현은 대답 대신 잠깐 웃었다. 몇 시간 전, 상자 옆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봤던 그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웃음이었다. 다만 이번엔 그 끝에 매달린 쓸쓸함이 어둠 속에서 조금 더 또렷했다.
"화내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가 랜턴 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그거 3년 전에 다 해 봤어요."
3년 전.
그 두 글자가 다시 층의 어둠에 걸렸다. 지원은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야 했고, 동시에 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3년 전에 무엇을 그렇게 다 써 버렸기에 지금 저토록 담담한지 — 그 답의 절반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알고 싶지 않아서 3년을 눈감아 온 것이었다.
랜턴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따라, 지원의 기억이 뒤로 끌려갔다. 붉은 비상등이 켜질 일 없던, 형광등이 하얗게 밝던 어느 낮으로.
프로젝트가 무너진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강 상무의 방은 여느 때처럼 서늘하게 밝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줄무늬로 들어와 회의 탁자에 얹혔고, 그 위에 붕괴 관련 서류가 반듯하게 정렬돼 있었다. 지원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나흘 동안 거의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정신없었지." 강 상무가 안경을 고쳐 썼다. 위로하는 어조였는데, 눈은 늘 그렇듯 웃지 않았다. "현장은 정리됐고. 다친 사람 없는 게 다행이야. 하마터면 크게 갈 뻔했어."
"…네." 지원은 짧게 답했다.
"자, 이제 뒷정리를 해야지." 그가 서류 한 장을 손끝으로 그녀 쪽으로 밀었다. 지원은 그게 뭔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사고 원인 보고서의 초안이었다. "위에서 감사가 들어올 거야. 원인이 어디였는지, 책임 소재가 어디였는지 — 깔끔하게 정리된 그림이 필요해."
"원인은…" 지원이 입을 뗐다. 목이 말랐다. "설계 단계에서 단가랑 납기를 무리하게 당긴 게—"
"팀장." 강 상무가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부드러워서 더 서늘했다. "그건 '위에서 그린 그림'이야. 위에서 그린 그림은 위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위가 책임 안 지게 만드는 게 자네 일이고."
지원은 그를 봤다. 3년 뒤 밀실에서 그녀가 도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게 되듯, 그 순간 지원은 강 상무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가자." 강 상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는 낮고 명료했다. "이 판이 통째로 흔들리면 팀이 날아가. 자네도, 자네 팀원들도, 3년 공들인 게 전부. 강 상무실이 흔들리면 그 위가 흔들리고, 그럼 이 회사가 흔들려.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아. 그렇지?"
"…"
"그러니까 원인은 실무선에서 정리하는 게 맞아. 도면 검토 단계에서 놓친 걸로. 한 사람. 깔끔하게." 그가 안경 너머로 그녀를 봤다. "누군가는 이름을 올려야 감사가 닫혀. 그게 다들 사는 길이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블라인드 줄무늬가 탁자 위를 아주 천천히 옮겨 갔다.
지원은 그 서류를 봤다. 원인이 어디였는지, 이 방에서 진짜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진실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걸 입에 올리는 순간 무너지는 건 회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검토를 실무선에서 놓쳤다고 쓰면," 지원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건… 실제와 달라지는데요."
"실제." 강 상무가 옅게 웃었다. "실제는 아무도 안 봐. 감사가 보는 건 종이야. 그리고 그 종이는 지금 자네 앞에 있고."
그는 만년필을 뽑아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소리 없이.
"팀장이 정리해. 누구 이름을 올릴지." 강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문이 닫히고, 방에는 지원과 그 한 장의 종이, 그리고 만년필만 남았다.
지원은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류의 '책임자' 칸은 비어 있었다. 그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이름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중 하나는 그녀 자신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 늘 마지막까지 남아, 아무도 안 보는 소수점 한 자리를 붙들고 있던 사람의 것이었다.
만년필은 그녀 앞에 놓인 채, 아직 아무 이름도 쓰지 않았다.
"팀장님?"
도현의 목소리에 지원은 랜턴 불빛으로 돌아왔다.
"괜찮으세요? 잠깐 어디 가 계셨는데." 그가 병을 다시 그녀 쪽에 내려놓았다. 물은 이제 정말 바닥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원은 병을 집어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미지근하고, 어딘가 비린 맛이 났다.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물러남이, 3년 전 그 방에서 그녀 혼자 만년필을 마주하던 침묵과 똑같이 느껴졌다. 그때도 지금도, 아무도 그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종이를 앞에 놓고, 이름을 쓰라고, 조용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지원은 어둠 속 그의 얼굴을 봤다. 3년 전, 그 빈칸에 끝내 어떤 이름이 올라갔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지금, 잘려 나가기 전날 밤에, 그녀에게 마지막 물을 양보하며 웃고 있었다.
"이 대리." 그녀가 입을 뗐다.
"네."
"3년 전에… 그 보고서 말이에요."
도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담담함이 아주 얇게 갈라졌다. 랜턴 불빛 아래에서, 그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