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KOEN
← 비상등만 켜진 층

4화. 며칠 됐어요

랜턴 불빛이 아까보다 누랬다. 기름이 아니라 배터리로 도는 LED였고, 색이 누레진다는 건 곧 꺼진다는 뜻이었다.

지원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12퍼센트. 신호 막대가 한 칸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조금 전 119에 걸었을 때도 연결음이 세 번 끊겼다. 접수는 됐다고 했다. 물이 빠지는 대로 인력을 넣겠다고. 그게 언제냐 묻자 대답이 지지직 잘려 나갔다.

자정을 넘겼다. 물이 빠지고 이 층의 셔터가 열리는 건 빨라야 동틀 녘일 것이다. 하지만 지원이 세고 있는 시각은 그게 아니었다. 아침 9시. 명단이 게시판에 걸리기까지 이제 아홉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그 9시에 무엇이 걸리는지 아는 사람은 이 층에서 그녀 하나뿐이었다.

하나뿐인 랜턴 건너편에 도현이 앉아 있었다. 무릎에 노트북을 얹고, 화면도 안 켠 채. 배터리를 아끼는 거였다. 늦게까지 남는 사람은 이런 것까지 몸에 배어 있었다.

물병은 반쯤 줄어 있었다. 아까 그가 억지로 쥐여 준 물이었다. 지원은 한 모금을 넘기고 뚜껑을 닫았다. 아침까지 이 한 병이라고 생각하니 목이 더 말랐다.

"팀장님." 도현이 화면 없는 노트북을 덮었다. "잠 안 오시면 눈이라도 붙이세요. 여긴 제가 볼게요."

"뭘 봐요, 여기서."

"물 차오르는 소리요." 그가 계단실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소리가 낮아지면 빠지는 거예요. 그때 되면 깨워 드릴게요."

지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이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를 듣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그녀를 더 죄었다.

몇 시간 전, 박선영의 통화가 아직 귀에 걸려 있었다. 상무님이 직접 손대신 부분이 있어요. 저 이 말 한 거 비밀로 해 주세요. 끊길 듯 떨리던 목소리. 그 한마디가 명단 맨 아래 이름의 무게를 바꿔 놓았다. 이건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사람 하나는.

말해야 한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게시판에서 자기 이름을 확인하게 두는 것보다는. 내 입으로. 지금.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같은 층이었지만 불은 살아 있었다. 천장 형광등이 환했고, 회의실 유리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촘촘했다. 그때의 지원은 머리가 어깨 아래로 조금 더 길었고, 밤을 새워도 눈빛이 지치지 않았다.

그날 밤, 프로젝트가 무너졌다.

이도현
이도현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에 싼 짐이었다.

정확히는, 숨겨 온 금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협력사 자재 검수 기록에서 빠진 항목이 발주 단계까지 그대로 흘러 들어갔고, 현장에서 문제가 터졌다. 사람이 다칠 뻔한 일이었다. 다행히 크게는 아니었지만, '다행'이라는 말로 덮기엔 위쪽이 이미 냄새를 맡은 뒤였다.

"팀장님." 그때의 도현이 서류 뭉치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넥타이가 반듯했고, 얼굴엔 아직 낙인이 없었다. 그저 다급할 뿐인, 밝은 얼굴. "검수 단계 기록을 다 뽑아 봤는데요."

"결과부터." 지원이 말했다.

"막을 수 있었어요. 누군가 그 단계에서 한 번만 잡았으면." 도현이 서류를 책상에 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이제부터 문제가 될 거라는 거예요."

지원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활자들이 눈에 안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서류의 어느 칸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누구보다 먼저.

복도에서 구둣발 소리가 다가왔다. 느리고, 여유로웠다. 밤늦게 이 층까지 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 오고 있었다.

"강 상무님이세요." 도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문이 열렸다. 강민석은 금테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훑고, 웃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다들 늦게까지 고생이 많네." 그가 회의실 의자를 빼서 앉았다. 앉으라는 손짓도, 서 있으라는 손짓도 없었다. "현장 건은 들었어. 위에까지 올라갔고."

"경위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말했다.

"경위서." 강민석이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경위서에는 이름이 들어가야지. 사고가 났으면, 그 사고를 낸 사람의 이름이."

회의실 공기가 한 뼘 내려앉았다.

붉은 비상등이 도현의 옆얼굴에 얇게 걸쳐 있었다. 지원은 그 얼굴을 3년째 정면으로 받지 못했다. 지금도 랜턴 불빛 언저리로, 시선을 비껴 두고서야 볼 수 있었다.

서지원·이도현
서지원·이도현 알아요. 며칠 됐어요.

"이 대리." 지원이 물병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저 말이에요."

"네."

"…미안해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그녀는 한 번 삼키고 다시 말했다. "내일이면, 아침이 되면… 이 대리가 알게 될 게 있어요. 게시판에서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내 입으로—"

"알아요."

지원의 손이 멈췄다.

도현은 계단실 쪽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그냥, 오래전에 다 정리해 둔 말을 꺼내듯이 말했다.

"며칠 됐어요."

층이 조용했다. 빗소리와, 어딘가에서 물이 차오르는 낮은 소리뿐이었다.

"…뭘." 지원이 겨우 물었다.

"제 이름이 명단에 있는 거요." 그가 이제야 그녀를 봤다. 놀란 사람을 안심시키는, 처음 랜턴을 들고 나타났을 때의 그 미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그 미소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인사팀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가 반 박자 멈칫했다. 이름을 삼키는 멈칫이었다. "그 사람이, 자기 목 걸고 귀띔해 준 거예요. 누군진 묻지 마세요."

누구냐고, 지원은 묻지 못했다. 이 조직 어딘가에 제 자리를 걸고 도현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그녀를 찔렀다.

지원은 그의 책상 옆 상자를 봤다. 머그컵, 액자, 반쯤 담긴 화분. 이 밤이 시작될 때부터 그녀가 우연이라고, 대청소일 거라고, 그렇게 믿어야만 물을 삼킬 수 있어서 믿기로 했던 상자.

우연이 아니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에 싼 짐이었다.

강민석
강민석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이 일이 조용히 덮이지.

"그런데 왜." 지원의 말이 흔들렸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한테 따질 수도 있었잖아요. 왜 하필 나냐고. 왜 지금이냐고."

"팀장님이 그 명단 올리면서 어떤 얼굴이었는지, 제가 봤거든요." 도현이 상자 쪽으로 손을 뻗어, 삐져나온 화분 잎을 무심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며칠째 제 자리 쪽으로 고개 못 돌리시는 것도요. 저까지 주저앉은 얼굴로 매달리면, 팀장님이 정말 무너질 것 같더라고요."

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짐 미리 싸는 거, 그게 팀장님 마음 편하자고 한 짓은 아닌데." 도현이 옅게 웃었다. 미소 끝이 늘 그렇듯 조금 쓸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서로."

그 배려가, 나무람보다 아팠다. 차라리 그가 원망했다면 지원은 견뎠을 것이다. 원망은 갚을 방법이라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는 갚을 것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짐만 쌌다.

"…물 드세요." 도현이 물병 쪽으로 눈짓했다. "아껴 마시고요. 이 밤 길어요."

지원은 물병을 들었다. 뚜껑을 여는 손이 떨렸다. 3년을 봉해 온 무언가가, 그의 담담함 앞에서 처음으로 목 끝까지 차올랐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일 아침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훨씬 무거운 것이었다. 그걸 지금 꺼내야 할지, 이 어둠이 그러라고 등을 미는 건지.

입을 열려는데—

강민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경위서에 올릴 이름, 내일 오전까지 정해서 가져와." 그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이 일이 조용히 덮이지. 팀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보다는, 이름 하나가 낫지 않겠어."

문이 닫혔다. 구둣발 소리가 멀어졌다.

회의실에 남은 두 사람 사이로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창밖 어딘가에서 붉은 경광등 불빛이 유리를 훑고 지나갔다. 3년 뒤의 비상등과 꼭 같은 색이었다.

도현이 책상 위 서류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지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 몰랐다. 그녀는 그 서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손안으로 들어온 종이의 어느 칸이, 방금 이름 하나를 요구하는 빈칸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그 이름이 누구여야 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