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손댄 자리
자정이 가까웠다.
랜턴의 노란 웅덩이는 두 시간 전보다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지원은 그 빛이 줄어드는 걸 자꾸 재게 됐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버릇이 이 밤엔 번번이 헛돌았다. 줄어드는 것들만 세게 됐다. 랜턴, 물병, 휴대폰 배터리. 화면을 켜 보니 23퍼센트였다. 아침 9시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고, 그녀가 쥔 건 그게 전부였다.
물병은 도현이 아까 그녀 책상에 내려놓은 그 한 병뿐이었다. 반쯤 줄어 있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한 모금씩, 서로 상대가 더 마시라며 미룬 결과가 그 절반이었다.
"랜턴, 아껴야겠어요." 지원이 말했다. "아침까지 버틸까."
"버텨요." 도현은 제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랜턴 불빛을 보고 있었다. "심지 낮추면 더 가고요. 밤새는 건 제가 좀 하거든요."
농담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냥 밤을 많이 겪은 사람의 말이었다. 지원은 대꾸 대신 랜턴의 밝기를 한 단 내렸다. 빛의 원이 한 뼘 더 오그라들었다. 그 바깥은 이제 완전한 어둠이었고, 파티션들은 그 어둠 속에 형체 없이 잠겨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서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지원은 흠칫했다. 정전 이후 신호는 한 칸이 붙었다 죽었다를 반복했다. 폭우가 기지국 어딘가를 때리는 모양이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의 손이 잠깐 멈췄다.
박선영.
인사팀 대리. 이 명단을 실무로 취합한 사람. 이 시간에 걸려 올 전화가 아니었다. 지원은 도현 쪽을 한 번 보고, 랜턴에서 몇 걸음 물러나 파티션 뒤 어둠으로 들어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잡음이 먼저 쏟아졌다.
"…팀장님?" 선영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것처럼 끊겼다. "통화… 괜찮으세요?"
"선영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저… 팀장님 아직 사옥이시라고… 경비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거기 지금 물이—"
"괜찮아. 아침에 물 빠지면 나가.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잠깐 잡음만 흘렀다. 지원은 선영이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말을 꺼낼지 정하지 못한 사람의 침묵이었다.
"저… 제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요." 선영의 말끝이 자꾸 아래로 꺼졌다. "내일 그거… 최종본요. 팀장님이 올리신 안이랑… 달라요."
"뭐가 달라."
"제가 취합한 초안에는… 그 자리에 다른 분이 있었어요. 근데 상무님실에서 내려온 최종본에는… 이도현 대리님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상무님이… 직접 손대신 부분이에요."
지원의 손끝이 파티션 모서리에서 굳었다.
명단 맨 아래 그 이름. 며칠째 고개를 돌리지 못했던 그 이름. 그녀는 그걸 자기가 자른 이름이라고 믿어 왔다. 자기가 올린 명단이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 원래는 도현이 없었다.
"…확실해." 목소리가 낮게 나왔다. 어둠 저편 랜턴 곁에 앉은 도현에게 새어 가지 않도록.
"제 손을 거쳐서요. 제가 봤어요." 선영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팀장님, 저 이거 말한 거… 비밀로 해 주세요. 이거 새어 나가면 저 잘려요. 진짜로요. 저 그냥… 팀장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선영 씨—"
신호가 죽었다. 잡음이 뚝 끊기고, 통화 종료 화면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떴다. 지원은 그 파란 빛에 얼굴이 물든 채 한참 서 있었다. 다시 걸어 봐야 신호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배터리는 이제 21퍼센트였다.
결재란엔 자기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상무가 손댄 자리든 아니든, 그 최종본을 아침 9시에 게시하겠다고 결재한 건 그녀였다.
이번 명단에 도현의 이름이 오른 건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위에서 누군가 그 자리를 파 놓고 그를 밀어 넣은 것이었다 — 그녀는 방금에야 그걸 알았다. 그런데 그 사실은 그녀를 조금도 가볍게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더 눌렀다. 이제 알았으니까. 알고도 아침 9시에 그 명단을 올리면, 그를 벼랑 아래로 미는 손은 여전히 그녀 손이었다.
그리고 이 밤의 벼랑과는 별개로, 3년을 가라앉아 있던 다른 무게가 따로 있었다. 이번 자리를 판 게 강 상무라 해도, 그것과 3년 전 그 일은 다른 문제였다. 그 오래된 부채는 통화 한 통으로 옅어질 만큼 가벼운 게 아니었다. 도현을 향한 3년 치 죄책감은, 여전히 온전히 그녀 몫이었다.
왜. 왜 하필 이도현인가.
그 질문은 새것이 아니었다. 3년 전부터 그녀 안에 잠겨 있던 질문이었다.
3년 전, 이 회사엔 아직 붉은 비상등이 없었다.
늦은 저녁, 회의실 형광등은 하얗게 밝았고 창밖은 아직 도시의 불빛으로 살아 있었다. 그 무렵의 지원은 머리가 지금보다 한 뼘 길었고, 눈매에 피로 대신 날이 서 있었다. 서른둘의 기획팀장. 회사가 처음으로 크게 밀어 본 프로젝트를 그녀가 끌고 있었다.
"이번 분기 안에 됩니다." 지원은 강 상무 앞에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때 그녀는 안 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옆자리엔 도현이 있었다. 낙인 같은 건 아직 아무 데도 찍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잘 웃었고, 밤을 새워도 눈꼬리가 지금처럼 쓸쓸하게 처지지 않았다. 지원이 큰 그림을 그리면 도현이 그 밑의 숫자를 맞췄다. 두 사람의 손발은 자주, 말 없이도 맞았다.
금이 처음 보인 건 하청 명단이 바뀌면서였다.
"단가를 여기서 15퍼센트 더 낮춰." 강 상무가 회의 탁자 건너편에서 안경을 고쳐 썼다. 미소를 지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 납기, 한 달 당기지. 위에서 그림을 그렇게 그렸어."
"상무님." 도현이 서류를 들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이 단가면 지금 업체는 자재 등급을 못 맞춥니다. 구조 검토도 한 달로는—"
"이 대리." 강 상무가 도현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부드러워서 더 서늘했다. "자네가 그리는 그림은 자네 그림이고. 위에서 그리는 그림은 위에서 책임져. 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시선이 지원에게 옮겨 왔다.
지원은 그때 도현의 우려가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숫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무리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강 상무의 눈을 마주 봤고, 그 자리에서 이기고 싶었다.
"맞추겠습니다." 지원이 말했다. "방법을 찾죠."
도현이 그녀를 봤다. 나무라는 눈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놀란, 그리고 조금 지친 눈이었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물러섬이, 3년 뒤 밀실에서 물병을 내려놓고 돌아서던 그 물러남과 똑같았다는 걸, 그때의 지원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늦게까지 남아 낮춰진 단가에 맞는 설계를 다시 짰다. 될 리 없는 숫자를 억지로 맞추는 일이었다. 도현이 커피를 내밀었고, 지원은 받지 않았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꺼져 갔다.
그 무리한 그림 어딘가에, 3년 뒤 모든 걸 무너뜨릴 실수가 이미 씨앗으로 심겼다는 걸, 두 사람 다 몰랐다.
랜턴 곁으로 돌아왔을 때, 도현은 상자 옆에 다시 걸터앉아 있었다.
반쯤 짐이 담긴 그 상자. 지원은 이제 그 상자를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상무가 손댄 자리, 원래 그의 것이 아니었던 이름,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미리 싸 둔 짐. 조각들이 어긋난 채 손안에서 굴러다녔다.
"통화, 괜찮으셨어요?" 도현이 물었다. 캐묻는 게 아니라 그냥 건네는 말투였다.
"…응. 회사 일." 지원은 물병을 집어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열지는 않았다.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지금은 배려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웠다.
지원은 그를 봤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오래 봤다. 랜턴 불빛 속에서 그는 담담했다. 자기 이름이 위에서 끼워 넣어진 것도, 아침이면 게시될 명단도 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물어야 했다. 왜 짐을 미리 쌌는지. 3년 전 그 밤 이후로 무엇이 그를 저렇게 조용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 자신이 오래 삼켜 온 것까지도.
지원은 입을 뗐다.
"이 대리."
도현이 랜턴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봤다. 붉지도 노랗지도 않은, 그 좁은 빛의 경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