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KOEN
← 비상등만 켜진 층

2화. 여덟 시간, 그리고 3년 전

랜턴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도현이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랜턴 밑동을 돌려 열었다. 건전지 하나를 빼 손바닥에 굴렸다가 방향을 바꿔 다시 끼웠다. 불빛이 제자리를 찾아 노랗게 고였다. 고장 난 것과 아직 쓸 만한 것을 손끝으로 가려내는, 오래 해 본 사람의 동작이었다.

"여분 두 개 남았어요." 그가 건전지 두 알을 흔들어 보였다. "아껴 쓰면 아침까지는 버텨요."

지원은 자기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화면 위쪽에 배터리 숫자와 신호 막대. 숫자는 예순 몇, 막대는 하나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폭우가 기지국 어딘가를 때리는 모양이었다. 아까 보낸 문자 한 통이 여태 '전송 중'에 멈춰 있었다. 회신은 없었다.

"신호가 안 잡혀요." 지원이 말했다.

"저층이 물에 잠기면 여기 중계기도 같이 죽어요. 비 그치기 전엔 될까 말까고요." 도현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와 지원 사이엔 랜턴 하나 놓인 책상 하나 거리가 있었다. 그 이상은 좁히지도 넓히지도 않는 거리였다. "119는 이미 저층 물 빼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우린 위험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여덟 시간. 지원은 속으로 그 숫자를 다시 셌다. 물 한 병, 예순 몇 퍼센트의 휴대폰, 건전지 두 알. 밖으로 나가는 문은 물에 잠겼거나 셔터로 봉해졌고, 안에는 자기가 자르기로 한 사람이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습관이 이번엔 도무지 작동하지 않았다.

책상 위, 그가 아까 놓아 둔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지원은 아까 한 모금 넘긴 뒤로 다시 손대지 않았다.

"안 드세요?" 도현이 물었다.

"아직 안 마려워서요."

"밤새울 건데 지금 조금씩 드시는 게 나아요. 한 번에 몰아 마시면 금방 없어져요."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덧붙였다. "저야 이런 밤에 익숙하니까."

서지원·이도현
서지원·이도현 서로가 마지막까지 남는 걸 겨루던, 그게 미련이 아니라 신뢰이던.

이런 밤. 지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랜턴 불빛 위로 미끄러졌다. 저 사람은 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었다. 오늘만이 아니라, 3년 내내.

그리고 그 문장이, 그녀를 뒤로 끌고 갔다.

같은 층, 다른 밤이었다. 그때는 붉은 비상등이 아니라 천장 형광등이 층 전체를 하얗게 밝히고 있었고, 마감을 앞둔 자리마다 데스크 램프가 텅스텐 색으로 켜져 저마다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야근이었지만 불이 살아 있는 밤. 지원의 머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길어 목덜미를 덮었고, 눈 밑엔 아직 그늘이 앉기 전이었다.

그때의 지원은 야심이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프로젝트는 회사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통째로 맡긴 판이었고, 그녀는 그걸 자기 이름으로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 밤을 새우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즐거웠던, 몇 안 되는 시기.

그날 밤에도 지원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자정을 넘겨 자료를 덮으려는데, 층 저쪽 끝에서 램프 하나가 아직 켜져 있었다.

"누구 아직 있어요?" 지원이 물었다.

파티션 너머에서 머리 하나가 올라왔다. 입사 얼마 안 된 실무자였다.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그날 처음 제대로 봤다. 이도현. 그때 그의 얼굴은 지금처럼 피곤에 절어 있지 않았다. 눈꼬리가 웃을 때 따뜻하게 접혔고, 미소 끝에 아직 쓸쓸함이 배기 전이었다.

"납품 사양서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도현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낮에 넘어온 하청 도면이랑 계약 스펙이 안 맞는 데가 있어서요. 두께 값이 한 군데 다르게 들어가 있었어요."

지원은 그 자리로 걸어갔다. 화면 속 숫자는 그녀도 그냥 지나쳤던 것이었다. 소수점 아래 한 자리. 아무도 안 봤을 자리였다.

"이거 틀린 거 확실해요?"

"단면 계산 다시 해 봤는데, 이대로 발주 나가면 나중에 하중 검토에서 걸립니다. 지금이면 도면 한 장 고치면 되고요." 도현은 자랑하듯 말하지 않았다. 그냥 늦게까지 남다 보니 눈에 걸렸다는 투였다. "말씀드리려고 팀장님 퇴근하시나 보고 있었어요."

서지원
서지원 화면 위 '통화 실패' 네 글자가,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유난히 오래 남았다.

지원은 그 밤을 오래 기억했다.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소수점 한 자리를 붙들고 자정을 넘긴 사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남의 실수를 조용히 받아 든 사람. 그녀가 이 판을 자기 이름으로 세우려면, 바로 그런 손이 필요했다.

"이 사원." 지원이 말했다. "앞으로 그런 거 눈에 걸리면 나한테 바로 와요. 밤이든 새벽이든."

도현이 잠깐 놀란 듯 그녀를 봤다. 그러곤 웃었다. 그날의 웃음엔 그늘이 없었다.

"그럼 팀장님이 저보다 먼저 퇴근하셔야 되는데요."

지원은 피식 웃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서로가 마지막까지 남는 걸 겨루던, 그게 미련이 아니라 신뢰이던.

랜턴 불빛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노랗고 좁은 웅덩이. 그 너머로 3년이 지난 도현이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반쯤 짐을 싼 상자를 발치에 두고 있었다.

지원은 목이 말랐다. 이번엔 다시 물병을 집어 한 모금 넘겼다. 미지근했다.

"…그때 그 도면." 지원이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이 대리가 밤에 잡았던 거."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빛이 먼저 말했다.

"두께 값이요." 도현이 대신 말을 이었다.

"그거 안 잡았으면 발주 그대로 나갔겠죠."

"나갔으면 나갔던 거고요." 도현은 담담했다. 지나간 일을 지나간 자리에 그대로 두는 사람의 말투였다. "그때는 다들 손발이 잘 맞았으니까요."

서지원·이도현
서지원·이도현 팀장님은 늘 남 걱정만 하고 본인은 안 챙기시네요.

그때는. 그 두 글자가 층의 어둠 속에 오래 걸렸다. 지원은 그 뒤에 붙을 말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 어쩌다 자기가 그의 이름을 명단 맨 아래에 올리게 됐는지, 그 3년의 간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팀장님." 도현이 랜턴 너머로 그녀를 봤다. "묻고 싶은 거, 안 물으시네요."

지원의 손끝이 병뚜껑 위에서 굳었다.

"뭘요."

"뭐든요." 그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늘 그렇듯, 한 발 앞에서 멈췄다. "밤 길잖아요."

지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것 사이 어딘가에, 그의 발치에 놓인 상자가 있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명단이 있었다. 그녀는 그 둘 다를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원이 화면을 돌려 봤다. 신호 막대가 순간 두 칸으로 붙었다. 그 틈으로 알림 하나가 겨우 밀고 들어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발신자 이름을 보고 지원은 잠깐 숨을 멈췄다.

인사팀, 박선영.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선영이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 일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다시 걸려는데, 두 칸이던 막대가 도로 하나로, 곧 빈칸으로 떨어졌다. 통화 연결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끊겼다. 화면 위 '통화 실패' 네 글자가,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유난히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