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맨 아래 이름
밤 10시. 기획팀 층에서 살아 있는 불빛은 서지원의 모니터 하나뿐이었다.
다들 나갔다. 파티션 너머로 의자 스물몇 개가 반듯하게 밀려 들어가 있고, 누군가 끄지 않고 간 가습기가 저 혼자 하얀 김을 뱉었다. 지원은 사원증을 목에서 빼 책상에 엎어 두고, 내일 아침 9시에 사내 게시판에 걸릴 파일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정리해고 최종 명단.
스크롤이 이름을 하나씩 아래로 밀어 냈다. 아는 얼굴들. 결재란에 자기 이름 석 자가 이미 박혀 있었다. 그녀가 올린 명단이고, 그녀가 자른 사람들이었다. 손끝이 트랙패드 위에서 규칙적으로 미끄러졌다. 열두 번째. 열세 번째.
맨 아래에서 손이 멈췄다.
이도현.
지원은 그 세 글자를 오래 봤다. 며칠째 그 사람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순간 커서의 무게로 손끝에 얹혔다. 이름 위에 커서를 올려 두었다. 지울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녀가 올린 명단이니까. 그런데도 커서를 치우지 못했다.
창밖에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잔소리처럼 커졌다.
발밑에서 둔한 진동이 올라온 건 그때였다. 건물 어딘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물러앉는 소리.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두 번째엔 돌아오지 않았다.
층 전체가 꺼졌다. 모니터도, 가습기도, 이도현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라졌다.
곧 천장 구석에서 붉은 비상등이 켜졌다.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파티션들이 낯선 짐승처럼 그림자를 늘였다.
지원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가방을 챙기고,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엘리베이터로 걸었다. 버튼을 눌렀다. 아무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문 너머는 그냥 캄캄한 통로였다. 엘리베이터는 멎어 있었다.
그녀는 잠깐 서서 숨을 골랐다. 통제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누는, 십몇 년 몸에 밴 습관. 비상계단. 걸어 내려가면 된다.
계단실 문을 당겨 열었다.
물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축축하고 비린, 지하의 냄새. 그 아래로 무언가 차오르는 소리 — 어둠 속에서 물이 계단을 한 칸씩 삼키고 있었다.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자 몇 층 아래 계단참에서 검은 수면이 번들거렸다. 빗물이 지하로 쏟아져 들어간 것이다.
그때 층 전체를 울리며 육중한 쇳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두꺼운 셔터가 레일을 타고 내려앉는 소리. 한 번, 그리고 조금 더 멀리서 또 한 번. 방재 셔터가 저층을 봉하고 있었다. 물을 막으려고, 이 건물이 스스로 문을 닫는 소리였다.
지원은 계단실 문틀을 붙잡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내려갈 길은 물에 잠겼고, 올라가 봐야 잠긴 옥상 문과 불 꺼진 빈 층들뿐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죽은 건물에서 밖으로 나갈 방법은 없었다. 물이 빠지고 전기가 돌아올 아침까지, 이 건물에 묶였다. 내일 아침 9시에 걸릴 그 명단과, 단둘이.
문을 닫고 돌아섰을 때, 붉은 어둠 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원의 손전등이 소리 쪽을 훑었다. 파티션 사이로 노란 랜턴 불빛 하나가 켜지더니, 천천히 이쪽으로 움직였다. 사람이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넥타이를 풀어 목에 걸친.
이도현이었다.
"팀장님." 그가 랜턴을 조금 들어 올렸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아직 계셨네요."
지원은 대답을 삼켰다. 이 층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하필 이 밤에 남아 있었다. 명단 맨 아래 그 이름이 지금 눈앞에서 랜턴을 들고 서 있다는 사실이, 목 안쪽을 막았다.
"…이 대리는 왜 아직."
"마감 하나 남아서요. 저는 원래 늘 마지막이라." 도현이 랜턴으로 계단실 문을 가리켰다. "그쪽은 안 됩니다. 지하 침수예요."
"알아요. 내려가 봤어요."
"내려가시면 안 돼요." 그가 한 발 다가섰다.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단단했다. "물 찬 계단에 전선이 지나가요. 여기 배전이 오래돼서 누전차단기가 제대로 안 떨어질 때가 있어요. 발목까지만 잠겨도 위험해요."
지원은 그를 봤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 건물 전기는 제가 제일 잘 알거든요." 도현이 대신 답했다. 자랑도 아니고 그냥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차단기실이며 배수 펌프며, 늦게까지 남다 보면 별걸 다 알게 돼요."
그가 랜턴을 책상 위에 세워 놓았다. 층의 한가운데에 노란 웅덩이 같은 빛이 고였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서 길게 만났다 떨어졌다.
여덟 시간이었다. 아침까지. 지원은 벽시계를 봤다. 초침이 멎어 있었다.
도현이 생수 한 병을 집어 그녀 쪽으로 왔다. 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답게, 밤을 버틸 물 정도는 곁에 챙겨 두는 모양이었다. 그가 병을 내밀었다.
"드세요."
"이 대리 마셔요."
"팀장님은 늘 남 걱정만 하고 본인은 안 챙기시네요." 도현이 병을 그녀 쪽 책상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나무라는 말도, 농담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 지켜본 사람의 말이었다. "저야 여기 익숙하니까."
지원은 그 물병을 봤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받지는 못했다.
"…3년 전에도," 도현이 랜턴 불빛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 프로젝트 밤샐 때도 이랬죠. 팀장님이 커피만 드시고—"
"그 얘긴 됐어요." 지원의 말이 조금 빨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굳이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물러남이 오히려 그녀의 속을 긁었다.
침묵이 층을 채웠다. 지원은 물병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랜턴을 조금 옮겼다. 빛의 원이 이동하면서, 도현의 책상이 그 안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다른 자리들은 전부 잡동사니로 어수선한데, 그의 책상만 유난히 말끔했다. 모니터 받침도, 서랍 위도 비어 있었다. 대신 책상 옆에 종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머그컵, 액자, 손바닥만 한 화분이 반쯤 담긴 채로.
지원은 얼른 눈을 돌렸다. 못 본 척 물병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속이 흔들렸다.
발표는 내일 아침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조차. 그런데 왜 벌써 짐을.
우연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청소를 했거나, 자리를 옮기려는 거겠지. 그런 흔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믿어야만 물을 삼킬 수 있었다.
도현이 상자 쪽으로 몸을 굽혔다. 남은 물건 하나 — 펜꽂이였다 — 를 집어 마저 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놀란 사람을 안심시키듯, 너무 담담하게.
지원은 그 미소를 마주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발표 전날 밤에 미리 짐을 싼 사람의 얼굴치고는,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웃음이라기엔 너무 고요하고, 다 아는 사람의 웃음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웠다.
랜턴 불빛 속에서 처음으로, 지원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사람,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