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홉 시
로비 자동문은 전기가 돌아왔는데도 반만 열렸다. 밤새 물을 먹은 레일이 뻑뻑하게 걸렸다. 두 사람은 그 좁은 틈으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밖은 비가 그쳐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가 회색으로 번들거렸고, 물웅덩이마다 트여 오는 하늘이 한 조각씩 담겨 있었다. 열두 시간 만에 밟는 바깥이었다. 지원은 잠깐 멈춰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밤새 폐에 쌓인 붉은 어둠과 곰팡내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도현이 상자를 고쳐 안았다. 반쯤 싼 채로 밤을 넘긴 그 상자였다.
"택시 잡아 드릴게요." 그가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리." 지원이 그를 불렀다. "이 판에 아직도 남 걱정이에요?"
도현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밤새 갈라졌던 담담함이 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밑에 어제까지 없던 게 하나 깔려 있었다. 두려움. 자기 것이 아니라 그녀 몫의.
"정말 되돌릴 방법 없어요?" 그가 물었다. "감사위원회는 아직 안 열렸어요. 지금 전화 한 통이면 없던 일로—"
"세 시간 뒤에 게시판 올라가요." 지원이 말을 잘랐다. 조용했다. "아홉 시에. 그 안에 강 상무가 뭘 할지, 이 대리가 나보다 잘 알잖아요."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은 지금쯤 벌써 알았을 거예요. 내가 뭘 보냈는지." 지원이 사옥을 올려다봤다. 밤새 자기를 가뒀던 건물이 아침 햇빛 속에서는 그냥 낡은 회색 콘크리트였다. "아홉 시까지 그걸 덮을 방법을 찾고 있겠죠. 그러니까 나는 그 안에 있어야 해요."
"팀장님." 도현이 무슨 말을 하려다,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제 이름, 정말 지우셨어요?"
"지웠어요."
"그럼 아홉 시에 게시판엔 뭐가 올라가요?"
지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지운 건 파일 속 이름 하나였다. 그 파일이 실제로 게시판까지 그대로 갈지는, 이미 그녀 손을 떠난 문제였다. 그 사이에 강 상무의 손이 있었다.
형광등이 유난히 하얗던 인사팀 구석 자리에서, 스물여섯의 박선영은 서류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징계 처분서였다. '책임자' 칸에 이도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사유란은 들어온 지 반년밖에 안 된 그녀가 읽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무너진 원인으로 적힌 항목과, 도현이 실제로 맡았던 업무가 어긋나 있었다. 반나절만 대조해 봐도 보이는 어긋남이었다.
선영은 그 서류를 들고 서지원 팀장에게 갔다. 그때 지원은 밤을 새운 얼굴로, 그러나 흐트러짐 하나 없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온 팀이 가라앉는 와중에 혼자 등을 꼿꼿이 세우고.
"팀장님, 이 처분서… 사유가 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선영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책임자가 이 대리님으로 돼 있는데, 이 항목은 이 대리님 담당이—"
"선영 씨." 지원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아주 잠깐 그것을 내려다봤다. "이대로 올려요."
"…네?"
"이대로 올리면 돼요." 지원이 서류를 돌려줬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고생했어요."
선영은 더 묻지 못했다. 그때 그녀에게 지원은 이 회사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배가 다 가라앉는데 혼자 키를 잡고 서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대로 올리라고 하면, 거기엔 자기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처분서는 선영의 손을 거치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상신도 결재도, 반년 차 사원인 그녀가 손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 어긋남을 맨 먼저 알아채고도 입을 다문 사람으로 남았다. 그리고 3년 동안, 아주 가끔, 그 어긋난 항목이 떠올랐다. 팀장님은 그때 그걸 몰랐을까. 알았을까.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획팀 층은 밤새 그녀를 가뒀던 그 층이 맞나 싶게 환했다. 형광등이 멀쩡히 켜졌고, 젖은 카펫에서 눅눅한 냄새만 남아 지난밤의 유일한 증거처럼 떠돌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해 젖은 바닥을 피해 다니며 수군거렸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다들 알았다. 무슨 일인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지원이 자기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층 안의 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강민석이 그녀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이 시각에 상무가 기획팀 층까지 내려온 적은 없었다. 그는 어제와 똑같이 광택 나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어제와 똑같이 웃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봤다. 금테 안경 너머의 시선이 그녀 얼굴을 한 번 훑었다. 밤새 뭘 겪었는지 다 읽어 내는 눈이었다.
"서 팀장."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얼굴이 상했네. 밤새 고생 많았어."
"…상무님."
"잠깐 볼까." 그가 회의실 쪽으로 턱짓했다. 부탁이 아니었다.
유리문이 닫히자 층의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강 상무는 앉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물이 빠진 거리를 잠깐 내려다봤다.
"새벽에 재밌는 메일이 돌더군." 그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감사위원 하나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 서 팀장 이름으로 온 자백서가 있다고. 3년 전 얘기까지 아주 자세히." 그가 돌아섰다. "밤새 갇혀서, 겨우 그런 걸 썼나."
지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3년 만이었다. 그 방에서 '잘했어' 소리를 들은 뒤로, 처음으로 이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받는 거였다.
"쓸 걸 썼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서 팀장." 강 상무가 한 발 다가섰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그 자백서에 제일 크게 적힌 이름이 누군지 알아? 이도현이 아니야. 강민석도 아니고." 그가 옅게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서지원이야. 3년 전에 그걸 알고도 눈감은 사람. 그 종이 직접 올린 사람. 자백이라는 건 남 것부터 무너뜨리지 않아. 자기 것부터 무너뜨리지."
"압니다."
"자리 하나 걸고 끝날 일이 아니야. 자네 3년이, 그동안 자네가 결재한 모든 게 다시 열려. 사람들은 서 팀장한테 무슨 대단한 양심이 있어서 그랬다고 안 봐. 밤새 그 남자랑 갇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 보지."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도현이 뭐라도 쥐여 줬나? 밤새."
지원의 손끝이 굳었다. 도현이 아직 품고 있는 그것. 밤새 한 번도, 열어 보라고 내밀지도 그녀 손에 쥐여 주지도 않은 그것. 그가 왜 그걸 끝까지 쓰지 않는지 그녀는 알았다. 그건 그의 것이었고, 그렇게 남을 것이었다.
"아무도 저한테 아무것도 안 줬습니다." 지원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이건 밤새 약해진 게 아니라, 3년 만에 겨우 똑바로 선 겁니다."
강 상무가 그녀를 오래 봤다.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아주 옅은 균열 같은 게 스쳤다. 계산이 어긋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직서도 같이 냈습니다." 지원이 말을 이었다. "제 것부터 무너뜨렸어요. 그래야 진짜니까요."
"…어리석군."
"아홉 시에," 지원이 회의실 벽시계를 봤다. 8시 41분이었다. "게시판, 예정대로 올리지 마세요. 그 명단은 이제 상무님 것도 제 것도 아니에요."
강 상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넥타이를 한 번 매만지고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에 그가 조용히 말했다.
"게시판은 아홉 시에 예정대로 올라가. 시스템이 하는 일이야. 자네가 파일에서 이름 하나 지웠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아." 그가 그녀를 돌아봤다. "3년 전에도, 자네가 그렇게 배웠잖아."
문이 닫혔다.
인사팀 층은 유난히 조용했다.
박선영은 자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엔 아홉 시에 사내 게시판으로 나갈 파일이 열려 있었다. 정리해고 최종 명단. 맨 아래, 이도현. 새벽에 강 상무실에서 직접 전화가 왔었다. 원본 그대로 올려. 서 팀장이 손댄 버전 말고.
선영의 커서가 '게시 예약' 위에 놓여 있었다. 아홉 시. 그녀가 누르지 않아도, 예약은 예약대로 돌아갈 거였다. 그 손이 떨렸다. 3년 전, 형광등 하얗던 그 자리에서 어긋난 처분서가 위로 올라가는 걸 못 본 척 넘겼을 때처럼.
그때는 물어보지 못했다. 팀장님은 알았을까, 몰랐을까. 그런데 오늘 새벽, 감사위원회에서 인사팀으로도 확인 요청이 내려왔다. 3년 전 그 처분서의 어긋남을 그때 알아챈 사람이 있는지. 이번 명단에 상무가 개입한 정황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두 질문의 답을 다 아는 사람이, 이 층에 하나 있었다. 그녀였다.
모니터 옆에 놓인 사내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그녀가 도현에게 명단을 흘릴 때 썼던 그 전화. 흘린 게 발각되면, 다음 명단 맨 아래에 오를 이름은 자기 것이었다. 3년을 그녀는 그 공포로 입을 다물어 왔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서지원이 인사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밤새 갇혔다 나온 얼굴로, 그러나 등은 3년 전 그날처럼 꼿꼿이 세우고. 다만 오늘은 그 눈이 선영을 피하지 않았다.
지원이 그녀 앞에 섰다. 벽시계가 8시 59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박 대리." 지원이 말했다. 3년 전 그날 지원이 자기를 부르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러나 뒤에 붙는 말이 그때와 달랐다. "나, 이번엔 이대로 올리라고 안 할 거예요."
선영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커서는 아직 '게시 예약' 위에 있었다.
"새벽에 다 적어서 감사에 넘겼어요." 지원이 말했다. "3년 전 그 처분서까지, 하나도 안 빼고. 그러니까 곧 여기로 사람들이 올 거예요. 박 대리한테도 그때 얘길 물을 거고." 그녀가 잠깐 숨을 골랐다. "그때 뭐라고 답할지는… 이번엔 내가 대신 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원은 돌아서 자기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몇 분 뒤, 정말로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몰려왔다. 사원증을 목에 건 낯선 사람들. 지원의 자백서가 먼저 도착해 불러들인 사람들이었다. 감사위원회가 인사팀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3년 전 징계 처분 건으로 왔습니다. 그때 이 일을 가까이서 보신 분, 계십니까?"
층 안의 모든 얼굴이 굳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형광등만 하얗게 층을 채웠다. 3년 전 그 아침과 똑같은 흰빛이었다.
선영의 손이 떨렸다. 3년을 다문 입이었다. 여기서 손을 들면, 다음에 무너지는 건 자기 자리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끝을 흐리지 않고.
"…저기요." 선영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