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역류
물이 빠진 지 아흐레가 지났다.
지원은 그동안 같은 회의실 문을 세 번 열고 들어갔다. 감사위원회. 밤새 갇혔던 층과 달리 그 방은 늘 형광등이 하얗게 밝았고, 창으로는 회색 낮이 들었다. 붉은빛도, 랜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방에 앉을 때마다 지원은 그 새벽의 냄새를 맡았다. 물비린내. 3년을 눌러 온 것을 제 손으로 꺼내 탁자에 올려놓을 때 목 안쪽에서 올라오던 냄새.
세 번째 진술을 끝내고 나온 복도에서 도현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셔츠 소매는 여전히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 있었지만, 넥타이는 이번엔 제대로 매여 있었다. 참고인으로 불려 다니는 사람의 매무새였다. 그도 3년 전 그 경위서의 당사자였으니까.
"오래 걸렸네요." 도현이 몸을 세웠다.
"늘 같은 걸 물어요." 지원이 복도 끝 창을 봤다. "그 경위서. 이번엔 누가, 왜 그 빈칸을 채웠는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사실대로."
도현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지원은 알았다. 사실대로라는 말 안에 그녀 자신의 도장이 들어 있다는 걸.
"그 USB." 도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안 냈죠."
"안 냈어요. 안 낼 거고요." 지원이 그를 봤다. "그건 이 대리 물건이에요. 저 방에 올라간 건 전부 제 이름으로 낸 거예요."
"그거 하나면 훨씬 빨리 끝나요." 도현이 말했다. "팀장님이 도장 얘기까지 안 해도."
"빨리 끝나는 게 목적이었으면," 지원이 옅게, 웃음이라고 하기엔 지친 것을 입가에 걸었다. "그날 새벽에 그냥 상무님 전화나 받고 잤겠죠."
도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나온 회의실 문을 한 번 봤다. 닫힌 문 안쪽에서, 그 방이 이제 누구를 보고 있는지 그도 알았다.
지난 아흐레, 지원의 새벽 문서 한 통이 사내를 한 번 뒤집었고, 그 파장은 그녀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위로 번졌다. 감사위가 이제 캐는 건 서 팀장이 왜 눈을 감았느냐가 아니라, 그 눈을 감게 만든 손이 누구 것이냐였다.
"저 방이 이제 보는 건 제가 아니에요." 지원이 말했다. "강 상무님이에요."
그 이름을 입에 올린 값을, 지원은 그날 저녁 지하에서 치렀다.
차 문을 열려는데 기둥 그늘에서 목소리가 왔다.
"서 팀장."
강민석이었다. 관자놀이의 은발도, 얇은 금테 안경도, 짙은 회색 정장도 그대로였다. 다만 늘 반 박자 여유롭던 그 자세가 오늘은 반 박자 빨랐다. 지원은 그 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3년을 그의 밑에서 결재선을 읽어 온 눈이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강 상무가 다가섰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본부장 자리를 발로 차고, 사직서를 스스로 냈어. 그것도 자네 도장이 찍힌 서류를 손수 감사위에 갖다 바치면서. 이게 무슨 그림인지 설명 좀 해줘."
"설명할 거 없어요." 지원이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제가 3년 전에 승인한 결재선, 거기 제 도장이 있어요. 그거 제가 냈어요. 상무님이 찾아내신 게 아니라."
강 상무의 미소가 아주 잠깐, 얇게 벌어졌다.
"그거 나오면 자네도 끝이야."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부드러워서 더 서늘한, 그 방에서와 똑같은 어조였다. "은폐 지시를 한 건 나라고 치자고. 그런데 그 사고 낸 도장은 자네 거잖아. 감사위는 그 둘을 같이 봐. 나 혼자 물에 빠지는 그림은 없어, 서 팀장. 빠지면 같이 빠져."
3년 전이었다면 이 말이 지원의 숨을 막았을 것이다. 자기 약점을 쥔 사람이 그것을 흔드는 소리. 그런데 이번엔 아무 무게도 실리지 않았다.
"알아요." 지원이 그를 정면으로 봤다. "그것도 제가 냈어요. 제 손으로."
강 상무가 멈췄다.
"상무님이 저를 끌고 들어가겠다고 협박하시는 건," 지원이 말했다. "제가 이미 걸어 들어간 방이에요. 상무님이 여실 문이 없어요. 제가 다 열어 놓고 나왔거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데, 늘 남보다 빨랐던 그 사람에게도 한 박자가 걸렸다. 약점을 쥐고 흔들려면 상대가 그걸 숨기고 있어야 한다. 지원은 숨기지 않았다. 스스로 다 내놓은 사람에게는 쥐고 흔들 손잡이가 없었다.
강 상무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처음으로, 그 여유로운 눈에 계산이 지나갔다. 지원을 회유하거나 위협해서 될 판이 아니라는 계산.
"…자네, 후회할 거야." 그가 돌아섰다. 그 말은 위협이라기엔 조금 늦었고, 조금 얕았다.
지원은 그의 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3년 동안 저 등을 향해 고개를 숙여 왔다. 오늘 처음으로 숙이지 않았는데, 무릎이 떨리지 않았다.
박선영은 그때 스물여섯이었고, 인사팀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는 신입이었다.
그날 그녀의 책상에 한 건의 서류가 내려왔다. 이도현 대리. 프로젝트 사고 관련 문책성 인사. 좌천과 감봉, 그리고 3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인사 기록의 붉은 줄 하나.
선영은 그 서류를 처리하기 전에 결재선을 훑는 버릇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온 그 건에는 익숙한 도장 두 개가 찍혀 있었다. 강 상무, 그리고 서 팀장.
그때 서 팀장이 인사팀에 그 서류를 확인하러 직접 내려왔다. 선영이 동경하던 사람이었다. 감정을 흘리지 않고, 어떤 회의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자 임원들 사이에서 제 판단으로 자리를 지키던 사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선영은 생각했었다.
그날 서 팀장은 이도현 대리의 그 서류를 오래 내려다봤다. 결재하지 않고, 처리를 재촉하지도 않고, 그냥 봤다. 선영은 그 옆얼굴에서 무언가를 봤다. 유능한 관리자의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를 삼키느라 굳은 얼굴을.
"…이거, 이대로 올려도 되는 거예요?" 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물여섯의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였다.
서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선영 쪽으로 밀어 놓고, "수고해요"라고만 했다. 그 목소리에 실린 게 무엇인지 그때 선영은 몰랐다. 지금은 안다.
선영은 그 서류를 그대로 처리했다. 결재선에 찍힌 도장 두 개 중 하나가 왜 그렇게 오래 그 종이 앞에 머물렀는지 묻지 않았다. 신입이 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톱니 하나가, 아무 소리 없이 한 사람의 3년을 갈아 넘겼다.
박선영이 지원의 자리로 찾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야근등만 켜진 층이었다. 파티션 너머 불빛은 드물었고, 선영은 카디건을 여미며 목에 건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통화할 때마다 어깨가 굳고 말끝을 흐리던 그 버릇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팀장님." 선영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저… 감사위에 진술서 넣었어요."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정리해고 명단이요." 선영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이번엔 말끝이 흐려지지 않았다. "실무는 제가 짰어요. 그런데 딱 한 줄, 위에서 직접 내려온 게 있었어요. 이도현 대리. 그 자리 숫자는 원래 다른 이름이 들어갈 칸이었는데, 상무님이 직접 바꾸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지시가 왔고, 제가 고쳤어요."
지원은 숨을 멈췄다. 아흐레 전 그 밤, 끊길 듯 이어지던 통화 — "상무님이 직접 손대신 부분이 있어요" — 그 겁먹은 목소리의 임자가 지금 제 앞에 서 있었다.
"그거, 제 이름으로 다 적었어요." 선영이 말했다. "누가 언제 지시했는지, 제가 어떻게 고쳤는지. 발각되면 제가 잘리는 거 알아요. 명단 실무자가 그걸 흘렸다고 하면… 저 이 바닥에서 끝이에요."
"박 대리." 지원이 일어섰다. "왜 넣었어요. 안 넣어도 됐잖아요."
선영이 잠깐 지원을 봤다. 3년 전 인사팀에서 그 옆얼굴을 올려다보던 스물여섯의 눈으로.
"팀장님이 자기 도장 찍힌 서류를 손수 냈다는 얘기 들었어요." 선영이 말했다. "저는 3년 전에 그거 못 했어요. 물어보고 그냥 처리했어요. 그게 편했으니까. 그게 사는 길이었으니까."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는 팀장님처럼 되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러다간… 상무님처럼 될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톱니로만 있으면요."
층의 형광등이 낮게 웅웅거렸다. 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년 전 그 인사팀 책상에서 자기가 삼켰던 말을, 이 후배는 이제야, 자기 목을 걸고 뱉고 있었다.
"고마워요." 지원이 말했다. 그리고 그 두 글자가, 3년 전 도현에게 했던 그 값싼 "고마워요"와 얼마나 다른 무게인지 알았다. 이번엔 누군가 대신 짐을 져줘서가 아니라, 누군가 제 몫의 짐을 스스로 들어서 하는 말이었다.
물길이 방향을 튼 건 그 진술서 한 장 뒤부터였다.
박선영의 실무 진술이 강 상무의 '직접 지시'를 문서로 못 박자, 감사위의 시선이 완전히 돌아섰다. 서 팀장의 자백은 3년 전 사고의 은폐를 가리켰고, 박 대리의 진술은 이번 명단이 그 은폐의 연장선 — 위험한 목격자 하나를 조용히 밀어내려는 손이었음을 가리켰다. 두 갈래 물이 한곳으로 모여 역류했다. 3년 전 강민석이 실무선에 떠넘겨 지하로 흘려보낸 것이, 이번엔 반대로 그를 향해 거슬러 올랐다.
이사회가 강 상무의 직무를 정지시켰다는 통보가 사내 게시판에 걸린 날, 도현이 지원의 자리로 왔다.
"봤어요." 그가 말했다. 승리의 기색은 없었다. 3년을 갈아 넘긴 것이 되돌려지는 자리에서도, 그의 얼굴엔 서늘한 담담함만 있었다.
"이 대리 USB, 결국 안 썼어요." 지원이 말했다. "한 번도 안 열어 봤고요."
"압니다." 도현이 옅게 웃었다. 미소 끝이 여전히 조금 쓸쓸했다. "그게 제일 좋았어요. 저는 복수해서 이긴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팀장님이 그걸 지켜 줬네요."
판을 뒤집은 건 그의 카드가 아니었다. 지원의 자백과, 선영의 진술과, 3년 전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을 이제야 물은 두 여자의 용기였다. 도현의 물건은 끝까지 셔츠 주머니 속 어둠으로 남았고, 그 무욕은 훼손되지 않았다.
지원은 잠깐 그 담담한 얼굴을 봤다. 이제 그의 낙인이 벗겨질 차례였다. 그런데.
"팀장님." 도현의 얼굴이 문득 굳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 복도 쪽을 향했다. "저기."
지원이 돌아봤다.
감사위원회 간사가 서류철을 안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이 시각에 팀 사무실까지 직접 내려오는 경우는 하나뿐이라는 걸, 지원은 3년의 감으로 알았다.
"서지원 팀장님." 간사가 말했다. "위원회에서 팀장님 건, 결론 났습니다. 강 상무님 은폐 건과는 별개로요." 그가 잠깐 뜸을 들였다. "제출하신 사직서와, 팀장님 본인 책임에 대한 처분 — 함께 정해졌습니다. 내일 오전, 직접 들어오셔서 통보받으시랍니다."
강 상무가 물에 빠지는 건 이제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밀어 넣으려고 지원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 방이, 이번엔 그녀 자신을 어느 물가에 세울지는 — 아직,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