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불 켜진 층
전기가 한 번도 나간 적 없던 것처럼, 기획팀 층은 환했다.
천장 형광등이 빠짐없이 들어와 있었다. 붉은 비상등이 아니라 오후의 흔한 백색광. 그런데도 지원은 3주째 이 밝기가 낯설었다. 사람들이 그녀 자리를 지날 때 눈을 반 박자 늦게 떼는 방식, 복도 끝에서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는 방식이 — 낮에도 어딘가 비상등 하나를 켜 두고 있었다. 정전은 끝났는데, 이 층은 아직 완전히 불이 켜지지 않은 것 같았다.
봉투는 사내 메일에 섞여 흘러가지 않게, 손으로 왔다.
"팀장님." 박선영이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감사위원회 간인이 찍혀 있었다. "결과, 나왔어요."
지원은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박선영도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저도 진술했어요." 박선영이 사원증 줄을 만지작거렸다. "3년 전에 그 명단 만들 때, 위에서 뭐가 어떻게 내려왔는지. …말끝 안 흐리고 끝까지 말해 본 거, 저 그거 처음이었어요." 그 애의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흐려지려다, 이번엔 끝을 맺었다.
지원은 그 애를 봤다. 강 상무실 문 앞에서 보고서를 들고 서 있던 3년 전의 자기가 겹쳐 보였다. 그때 누가 옆에서 저렇게 떨고 있었다면, 자기는 무슨 말을 해 줬을까.
"잘—" 했어. 그 세 글자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지원은 삼켰다. 그 말이 어떤 무게인지 3년을 앓았으니까. 침묵의 대가로 건네지는 "잘했어"가 어떻게 사람 목에 걸려 안 내려가는지, 그녀는 알았다. 그래서 다르게 말했다.
"무서웠을 텐데." 지원이 말했다. "고마워요, 박 대리."
박선영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애는 고개만 한 번 숙이고 돌아섰다.
지원은 봉투를 열었다.
사직서는 반려였다. 대신 징계가 남았다 — 3년 전 은폐에 눈감은 데 대한 감봉과, 기록에 남는 견책. 무죄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완전히 깨끗한 채로 자리에 남는 건, 그날 밤 도현에게 했던 말을 배신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눈감은 건 협박당해서가 아니라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자백서에 자기 손으로 적었다. 그러니 값도 치러야 했다.
다만 마지막 한 문장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내부자의 자발적 자백이 없었다면 해당 사안은 끝내 묻혔을 것이며, 위원회는 그 판단과 감수한 위험을 신임한다.」
신임. 그 두 글자 앞에서 손끝이 잠깐 굳었다. 3년 전 강 상무가 "잘했어"라고 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정반대의 이유로 받은 두 글자였다. 3년 전엔 강 상무가 그녀의 입을 샀고, 이번엔 위원회가 그녀가 연 입을 신임했다. 값이 오른 게 아니라, 사려는 물건이 바뀌어 있었다.
늘 닫혀 있던 상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총무팀 직원 둘이 짐을 싸고 있었다. 트로피와 액자가 신문지에 말려 종이 상자에 아무렇게나 포개졌다. 반쯤 채운 상자. 지원의 걸음이 저절로 멎었다.
3년 전에도, 3주 전에도, 반쯤 싼 상자는 늘 도현의 몫이었다. 밀려나는 쪽의 물건, 잘리는 쪽의 살림이었다. 그 상자가 오늘은 이 방에 있었다.
강 상무는 창가에 서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밖을 보고 있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뗐다.
"서 팀장은 이길 줄 알았나."
"이긴 거 아닙니다." 지원이 말했다. "저도 그 사안에 이름이 있었으니까요. 상무님 다음 줄에."
그가 그제야 천천히 돌아봤다. 웃지 않는 눈은 여전했지만, 그 안을 채우던 여유가 빠져 있었다. 새벽 4시에 본부장 자리를 값으로 부르던 목소리도, 이 방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제 이름을 제가 부른 것뿐입니다." 지원이 말했다. "3년 늦게요."
강 상무는 한동안 그녀를 봤다. 협박할 카드도, 회유할 자리도 이제 그의 손에 없었다. 그는 다시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쓸 말이 남지 않아서였다. 지원은 그 등을 오래 보지 않고 돌아섰다. 판이 끝난 방은 그냥 조용했다. 사람을 효율로 지우던 언어가, 정작 자기가 지워질 때는 한마디도 갖지 못했다.
도현의 자리가 옮겨진 건 그해 겨울이었다.
창가 팀에서 배전반 옆 구석으로. 승진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소리 없이 빠졌고, 아무도 그 이유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낼 필요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말아먹은 사람.' 그 한 줄이면 옮겨진 자리도, 비껴 가는 눈빛도 다 설명됐다.
그 구석에서 도현은 가장 늦게까지 남는 사람이 됐다. 남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낡은 차단기가 어느 습한 밤에 제멋대로 떨어지는지, 지하 배수 펌프가 장마철이면 어떻게 우는지. 회사가 3년 뒤에 잘라 내려던 그 축적된 앎을, 그는 남이 정해 준 구석 자리에서, 남이 정해 준 시간에 쌓았다.
지원은 매일 그 구석을 지나쳤다. 매일 그의 얼굴을 못 봤다. 못 본 게 아니라 안 봤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그 자리가 왜 그의 자리가 됐는지를 제 입으로 인정하게 될까 봐. 3년을 그렇게 옆으로만 지나쳤다.
도현은 그 구석 자리에 있었다. 3년을 앉은 그 자리에. 책상 위에는 상자가 다시 올라와 있었다. 세 번째 상자였다.
"복직도 보상도 소급해서 다 나온다던데요." 지원이 그 앞에 섰다. "직급 되돌리고, 3년 치를 한꺼번에. 위에서 자리도 새로 만들어 준다고."
"들었어요." 도현이 머그컵을 신문지에 말았다.
"근데 왜 또 상자예요."
도현이 손을 멈추고 그녀를 봤다. 밤을 새운 그 층에서 마지막으로 지었던, 조금 쓸쓸한 미소가 다시 걸렸다. 다만 이번엔 갈라지지 않은 미소였다.
"3년 전에도, 3주 전에도, 이 상자는 누가 싸라고 해서 쌌어요." 그가 말했다. "상무님이든, 명단이든. 저는 늘 남이 정한 퇴장만 했고요." 컵을 상자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아무도 안 시켰어요. 그게, 좀 다르네요."
지원은 붙잡을 말을 삼켰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또 남의 결정 안에 세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3년 전에 그의 이름을 그 빈칸에 앉힌 게 자기였으니까.
도현이 서랍을 열었다. 안쪽 깊은 데서 손바닥만 한 것을 꺼냈다. 3주 전 그 밤,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파기되지도 쓰이지도 못한 채 어중간하게 걸려 있던 그 물건이었다. 강 상무의 치부가 담겼다던.
"그날 아침 9시에," 도현이 그것을 잠깐 들여다봤다. "게시판에 걸릴 명단에서 제 이름이 지워졌죠. 팀장님이 대신, 이사회에 자기 이름을 올렸고." 그가 옅게 웃었다. "이건 결국 한 번도 안 썼네요."
"안 쓴 게 아니라," 지원이 말했다. "안 써도 되게, 내가 만들었어야 했던 거예요. 3년 전에."
도현은 그것을 상자에도, 주머니에도 넣지 않았다. 책상 옆 파쇄함에 넣었다. 판을 통째로 뒤집을 수 있었던 카드가, 끝내 아무것도 뒤집지 않고 종잇조각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두는 게 그가 3년을 지켜 온 방식이었다. 남의 잘못을 쥐고도 무기로 갈지 않는 것.
"팀장님이 뒤집었잖아요." 그가 말했다. "제 걸로가 아니라, 팀장님 이름으로. 그럼 된 거예요."
지원은 그 얼굴을 이제 피하지 않고 봤다. "이제 어디로 가려고요."
"아직 안 정했어요." 도현이 상자 뚜껑을 접었다. "근데 이번엔 그게 좋아요. 3년 만에 처음으로, 제 다음이 명단으로 안 정해져 있어서. 작게라도 제가 세운 데서 다시 해 보려고요. 남이 앉혀 준 자리 말고."
낮에 한 차례 쏟아지던 비가 개어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가 저녁빛을 되비쳤다. 3주 전 그 밤엔 이 비가 층을 잠그고 두 사람을 아침까지 가뒀는데, 오늘은 그냥 길을 씻어 놓고 물러가 있었다. 도현이 상자를 안고 회전문을 밀고 나섰다. 지원이 그 옆에 섰다.
지원이 편의점 봉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내밀었다.
"드세요." 그녀가 말했다.
도현이 물병을 봤다가, 그녀를 봤다. "…팀장님이 저 챙기시는 거예요? 웬일로."
"이 대리 늘 마지막까지 남더니, 오늘은 내가 마지막으로 남네요." 지원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물기가 없었다. "본인은 안 챙긴다면서요, 늘. 남 걱정만 하고."
그 밤 랜턴 옆에서 도현이 그녀에게 건넸던 그 물병이, 3주 만에 방향을 바꿔 돌아왔다. 도현이 그것을 받았다. 잠깐, 두 사람 다 그 밤을 떠올린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상자를 든 사람과, 그 옆의 사람. 이제 한쪽이 다른 쪽의 명단을 쥔 사이가 아니었다. 자를 사람도, 잘릴 사람도 아니었다.
"이 대리—" 부르다가 지원이 멈췄다. 상자가 나가는 마당에, 그 호칭도 함께 나가는 중이었다. "이제 이 대리도 아니네요."
"그러네요." 도현이 물병 뚜껑을 열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시게요?"
지원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3년을 못 부른 이름이었다. 3년을 못 본 얼굴이었고. 이제 그 얼굴이 저녁빛 속에서 — 붉은 비상등도, 꺼져 가던 랜턴도 아닌 맨 빛 속에서 —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피할 이유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천천히요." 지원이 말했다. "이제 시간은 있으니까."
도현이 웃었다. 이번엔 쓸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 갠 거리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 사옥이 층마다 불을 환하게 밝히고 서 있었다. 어느 창에도, 붉은 비상등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