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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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아무도 모르는 애

비워진 아파트에서 그 남자를 만난 지 열흘, 도하의 폰은 얌전했다. 얌전해서 더 신경이 쓰였다.

세아가 상담소 문을 밀고 들어와, 출력물 한 장을 도하 앞 테이블에 내려놨다.

“성일고 3학년.” 그녀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말했다. “학생이 나한테 보냈어요. 우리 학교 괴담 좀 검증해 달라고.”

도하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컵라면 뚜껑을 눌러 덮으며 대꾸했다.

“그럼 가서 검증하면 되겠네요. 그쪽 전문이잖아요.”

“같이 가요.”

도하의 젓가락이 멈췄다. 그는 세아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그 말을 아주 짧게 했다. 짧을수록 오래 준비한 말이었다.

“…나를 부른다고요.” 그가 물었다. “두 주 전엔 멱살 잡던 사람이.”

“그땐 내가 못 보는 게 없다고 믿었으니까요.” 세아가 문을 도로 잡았다. “지금은 아니에요. 나가요.”

도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코트를 집으며 중얼거렸다.

“월급도 안 나오는데 출장까지 다니네.”

“차비는 드려요.” 세아가 말했다.

성일고 정문 앞, 담벼락 그늘에 여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교복 위에 가디건, 가방끈을 두 손으로 꽉 쥔 채였다. 세아가 다가가자 아이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강예린이요. 메일 보낸 사람.” 아이가 말했다. 인사도 없었다. “3학년 7반.”

예린이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필름 카메라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세아가 사진을 받아 들고, 잠깐 들여다봤다.

“…혼자 찍었네요.”

예린의 턱이 굳었다.

도하가 옆에서 본 사진 속엔 두 사람이 있었다. 교실 창가, 예린의 어깨에 팔을 두른 여자애. 웃는 입매까지 선명한데, 명찰이 붙어야 할 자리만 하얗게 비어 있었다.

사물
사물 ― 명찰이 붙어야 할 자리만,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박서진.” 예린이 말했다. “3학년 7반. 제 짝이요. 삼 주 전까지 매일 같이 등교했어요.”

“학교엔 확인했어요?” 세아가 물었다.

“했죠.” 예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울음이 아니라 화였다. “담임도, 애들도, 서진이네 엄마도— 다 그런 애 없대요. 서진이 엄마가요. 자기 딸을요. 문 앞에서 저한테 누구냐고 물었어요.”

세아가 뭐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다들 왜 거짓말해요.” 예린이 사진을 도로 뺏듯이 가져갔다. “제가 미쳤대요. 근데 제가 미치면, 이 사진도 같이 미쳐요?”

“…경찰은요.” 도하가 물었다.

“실종신고요?” 예린이 그를 봤다. 열여덟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없는 사람은 실종도 못 해요.”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슬쩍 끌어내려 손등을 덮었다. 서류상 죽은 남자가 받아칠 말은 아니었다.

없는 사람은 실종도 못 한다. 7년 동안 아무도 그를 찾지 않은 이유를, 그는 방금 열여덟짜리한테 들었다.

세아가 그를 돌아봤다. 도하는 예린의 어깨 너머, 아무것도 없는 담벼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과 후의 3학년 7반은 형광등 절반이 꺼진 채였다. 창가 맨 뒷자리 하나만 의자가 책상에 올려져 있지 않고,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누가 방금 앉았다 간 것처럼.

책상 상판에 지우개 가루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며칠 치는 돼 보였다. 도하는 상판 위를 훑었다. 가루는 있는데, 지운 자리가 없었다. 공책도, 종이 한 장도.

“청소 안 해요?” 세아가 남아 있던 학생 둘을 돌아봤다.

“거긴 안 만져요.” 안경 쓴 아이가 말했다.

“왜요.”

안경 쓴 아이가 입을 열었다가 닫고, 옆 아이를 봤다. 옆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요.” 안경 쓴 아이가 진심으로 답했다. “원래 그래요.”

“…명찰함 얘기 하시는 거예요?” 옆 아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거기 저 자리 명찰이 하나 남아 있는데요. 이름이 자꾸 바뀐대요. 애들이 그러는데, 저는 안 봤어요. 진짜로.”

세아가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봤다는 애는 있어요?”

옆 아이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다 누구한테 들었대요.”

담임이라는 남자 교사가 복도에서 들어와, 그 자리를 힐끗 보고 말했다. “이 년 전에 이 교실 쓰던 학생이 하나 세상을 떠서요. 기려서 비워두는 겁니다. 그렇게 해 왔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세아가 수첩을 폈다.

교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삼 초쯤 있었다.

“…누구였더라.”

교실이 조용해졌다. 도하는 창가 자리를 봤다. 규칙만 남고, 이유가 죽은 자리였다.

“서진이가 저기 앉았어요.” 예린이 낮게 말했다. “삼 주 전에. 자리 바꾸기 하다가 걔가 뽑았어요. 제비는 그냥 서른 몇 개예요. 그 자리를 빼놔야 한다는 걸 아무도 기억 못 했어요.” 예린이 숨을 한 번 골랐다. “애들이 말리긴 했는데, 왜 안 되냐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 했어요. 서진인 그런 걸 못 참았어요. 이유 없는 건 안 지켜요. 그래서 그냥 앉았어요.”

예린이 그 자리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안에 물건이 남아 있었다. 반쯤 쓴 샤프심 한 통, 손톱만 한 지우개, 검은 머리끈 하나. 삼 주치 먼지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버리려면 누구 거냐고 물어야 했고, 물어볼 이름이 없었다.

“자리 바꿔 주겠다는 애도 있었어요.” 예린이 머리끈을 집어 자기 손목에 걸었다. “걘 싫다고 했어요. 무서워서 비워두는 자리면, 왜 비워두는지부터 알아야 된다고. 알아내면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알려줄 사람들은, 이제 서진을 모른다.

“알아냈대요?” 도하가 물었다.

“몰라요.” 예린이 서랍을 닫았다. “그 얘긴 다음 날부터 안 했어요.”

교무실. 도하가 빈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이럴 때 국과수에선 뭘 해요.”

“기록을 셋 이상 대조해요.” 세아가 서류철을 끌어당겼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게 실마리예요.”

“우리 쪽은 보통 그냥 무서워하는데.”

“그래서 안 풀리는 거예요.” 세아가 출석부와 학생부와 전산 명부를 나란히 펼쳤다.

셋 다 조용했다. 3학년 7반 명단에 박서진은 없었다. 있던 흔적조차 없었다.

“기록이 셋 다 없으면.” 세아가 말했다.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 놓고, 그녀가 자기 말을 한 박자 뒤에 다시 들었다. 정문에서 예린이 던진 문장이 아직 그녀 안에 걸려 있었다. 제가 미치면, 이 사진도 같이 미쳐요?

“여기요.” 예린이 출석부 한 줄을 손톱으로 짚었다. “여기 있었어요. 제 이름 밑에.”

세아는 그 빈 줄을 잠시 보다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그 칸에 또박또박 적었다. 박서진.

“됐어요. 이제 기록엔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도하가 뭐라 하기 전이었다.

잉크가 흐려졌다.

세아
세아 ― 종이가 잉크를 도로 삼켰다. 십 초도 안 걸렸다.

번지는 게 아니었다. 마르는 것도 아니었다. 획이 안쪽에서부터 옅어지더니, 종이가 잉크를 도로 삼켰다. 십 초도 안 걸렸다.

세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다시 썼다. 더 세게, 볼펜 촉이 종이를 파도록. 그 글씨도 옅어졌다.

세아가 출석부를 밀쳐 냈다. 그리고 자기 수첩을 꺼냈다. 아까 담임의 대답을 받아 적으려던, 그녀가 십 년 가까이 손에서 놓지 않던 물건.

“이건 학교 거고.”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이건 내 거예요. 내 기록엔 안 그래요.”

그녀가 수첩에 썼다. 박서진.

획이 안쪽에서부터 옅어졌다.

세 번째로 쓰려다, 그녀가 볼펜을 놓쳤다. 펜이 책상 위를 굴렀다.

“…잉크는.” 세아가 입을 뗐다. “잉크는 이렇게 안 돼요. 안료가… 이건 물리적으로.”

그녀가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소견서로 밥을 먹던 사람이었다.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그 세 글자가 아직 종이 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흐릿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요?” 세아가 그의 얼굴을 읽고 물었다. 목소리가 얇았다.

“…네.”

“내가 쓴 건데.” 세아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내 손으로 쓴 건데, 내가 못 보고 당신이 봐요?”

믿음이 무너지는 얼굴이 아니었다. 발밑이 꺼지는 얼굴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도하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왔다.

화면에 발신번호 표시 제한.

도하는 그것을 삼 초쯤 봤다. 빈 아파트의 남자가 했던 말이 먼저 떠올랐다. 그거, 우리가 한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저쪽이었다. 받으면 저쪽이 뭐라고 할지, 그게 무서웠다. 그는 화면을 눌러 끄고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안 받아요?” 세아가 물었다.

“오늘은 별로.”

그때 세아의 가방에서 벨이 울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봤다. 세아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같은 글자가 떠 있었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그거—” 도하가 손을 뻗었다.

세아는 도하를 한 번 보고, 그가 말리기 전에 받았다. 넉 달 전 상담소에서 그의 팔을 잡던 손이었다.

수화기에서 긴 잡음이 흘러나왔다. 빗소리 같기도 한 잡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 있었다. 복도 창으로 들어온 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세아가 전화를 끊었다.

“뭐래요.” 도하가 물었다.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도하의 눈을 똑바로 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하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서류를 읽을 때 눈을 내리깔고, 반박할 때 상대의 손을 봤다. 눈을 똑바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밤 여덟 시가 지나도 예린은 교문을 나가지 않았다.

“학생은 집에 가요.” 도하가 말했다.

“안 가요.”

“부모님이 찾을 텐데.”

“저희 엄마도 서진이 몰라요.” 예린이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제가 안 보고 있으면요. 서진이는 진짜로 없는 애가 돼요. 저까지 안 보면, 그럼 누가 봐요.”

손목에서 검은 머리끈이 따라 돌아갔다. 도하는 그걸 봤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도하는 세아를 봤다. 세아는 말리지 않았다. 말릴 논리가, 그녀에게 오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복도 끝 계단참.” 도하가 말했다.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요. 교실엔 나 혼자 들어갑니다.”

“왜요.” 예린이 물었다.

“보는 건 나 하나면 되니까.”

밤 열 시. 창가 맨 뒷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교복이었다. 이 학교 교복.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문질러 놓은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그런데 가슴의 명찰만은 선명했다.

박서진.

그것
그것 ― 얼굴은 지워졌는데, 이름만 선명했다.

그것이 손을 들었다. 손끝으로 자기 명찰을 문질렀다.

이름이 지워졌다. 지우개 가루 같은 것이 책상 위로 떨어져 소복이 쌓였다.

낮에 본 그 가루였다. 지운 자리가 없던 가루. 지워진 건 종이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도하의 손등이 욱신거렸다. 소매를 걷자, 자국이 손등을 벗어나 손목 안쪽으로 가느다랗게 흘러내려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풀지 않았는데.

그것은 도하를 보지 않았다. 도하에게 오지도 않았다. 지운 자리에 다시 손끝을 대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몇 번을 고쳐 가며.

해치려는 손이 아니었다. 옷을 하나씩 대 보는 손이었다. 이건 안 맞고,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며칠 치 가루. 그것은 며칠째 이러고 있었다. 이름을 지우고, 다른 이름을 대 보고, 또 지우고.

도하의 목이 말랐다.

“…네 이름은 뭐였는데.” 그가 물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없는 채로.

도하는 뒷걸음질을 쳤고, 등이 문틀에 닿았다. 뒤로 짚은 손바닥 밑에 무언가 걸렸다.

문틀 안쪽에, 물에 번진 검은 고리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매듭이었다.

민규의 현관. 비워진 아파트. 그리고 여기.

도하가 그 매듭 위에 손을 얹자, 냄새가 진해졌다. 비 젖은 흙과 소독약. 그는 저도 모르게 교실 안쪽을, 앉아 있는 그것을 돌아봤다. 냄새는 거기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세 번째였다. 도하의 머릿속에서 세 현장이 나란히 섰다가, 이어지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때 그것이 손을 내렸다. 새로 쓴 이름이 드러났다.

도하는 그 세 글자를 읽었다.

강예린.

그것
그것 ― 지워진 자리에, 다른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맞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아이는 이름을 빼앗기고, 빼앗긴 아이는 자기 이름을 되찾으려 남의 이름을 몸에 대 본다. 그런데 몸에 맞는 건 아무 이름이나가 아니었다. 아직 자기를 부르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박서진을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도하는 교실 문을 걷어차듯 열고 복도로 뛰었다.

“예린 학생!” 그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계단참에 세아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예린이 서 있었다. 가방끈을 쥔 채로, 도하 쪽을 보면서.

세아가 도하를 봤다. 그리고 도하가 부른 이름을 되짚듯,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누구요?” 세아가 물었다.

예린의 입술이 벌어졌다. 세아는 자기 바로 옆에 선 아이를 보지 않았다. 볼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도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세아가 손에 든 수첩을 내려다봤다. 자기가 왜 밤 열 시에 남의 학교 계단참에 서 있는지,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교실 아이들처럼. 몰라요. 원래 그래요.

바로 옆에 선 학생을, 세아는 이미 기억하지 못했다.

예린의 손목에서 머리끈이 한 바퀴 돌았다. 이제 그 주인을 아는 사람도, 그 아이를 아는 사람도, 같은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강예린을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하나뿐이었다.

명찰의 이름이 바뀌는 데는 손끝 한 번이면 됐고, 세아가 그 아이를 잊는 데는 그보다도 짧았다. 남은 건 얼굴 없는 것을 마주 보고 나온 남자 하나 — 그가 잊는 날, 강예린은 처음부터 없던 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