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름을 불러줄 사람
예린이 상담소 문을 연 건 오후 세 시였다. 교복 차림에, 어제 앉았던 그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세아가 노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예의 바르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린의 손가락이 교복 치마를 움켜쥐었다.
“…선생님. 저 어제도 왔었는데요. 그저께도요.”
세아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은 채로, 무릎 위 노트를 넘겼다. 거기엔 그녀 자신의 필체가 빼곡했다. 의뢰인 진술 — 같은 반 아이 하나가 지워지고 있음. 사진에서, 명단에서, 사람들 기억에서. 이틀치 기록. 날짜도, 시각도, 그녀가 늘 쓰는 그 반듯한 글씨였다. 다만 이름을 적었을 자리만, 두 번 다 비어 있었다. 의뢰인 이름도, 그 아이 이름도.
세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거. 누구 얘기예요?”
“박서진이요.” 예린이 겨우 말했다. “제 짝꿍이요. 사진에서도, 명단에서도 없어졌어요. 이제 저만 기억해요.”
도하는 그 순간 예린의 얼굴을 봤다. 예린은 울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등을 내려다봤다. 아직 거기 있는지 확인하듯이.
“장세아 씨.” 도하가 낮게 말했다. “그 노트, 그저께 쓴 거예요. 이 학생 이름은 강예린. 지금 그쪽 앞에 앉아 있고요.”
“…내가 왜 그걸 기억 못 해요.”
“어제도 그랬어요. 그저께도.” 그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그땐 며칠 못 잔 줄 알았지. 노트를 보기 전까진.”
예린이 조그맣게 물었다.
“아저씨는… 저 보여요?”
“보여요.”
“근데 왜 선생님은—”
“지워지는 게 명부라서요.” 도하가 말했다. “사진. 출석부. 사람 머릿속 명단. 나는 어느 명부에도 없어요. 지울 이름이 없는 거죠, 나한테는.”
그는 그 말을 뱉고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세아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그녀는 노트를 덮고, 자기가 쓴 문장 하나를 소리 내어 읽었다. 두 번. 읽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의 얼굴로.
“나는 기억이 안 나요. 근데 여기 내 글씨가 있어요.” 그녀가 노트 모서리를 눌렀다. “둘 다 사실일 수는 없어요.”
“둘 다 사실이에요. 그쪽 기억이 지워진 거지, 그쪽이 안 겪은 게 아니니까.”
“왜 당신은 멀쩡한데요.”
도하는 대답 대신, 세아가 며칠 전 테이블에 깔았던 그 서류를 떠올렸다. 신원조회서의 빈칸. 7년어치 공백.
“나는 서류에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만 편하네요. 죽어 있는 게.”
세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녹음기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도하를 정면으로 마주 앉았다. 그녀가 국과수 시절부터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이 나왔다.
“내 기억은 못 믿겠어요.” 그녀가 도하를 똑바로 봤다. “그러니까 당신 말을 믿을게요. 그쪽이 맞다고 치고, 거기서부터 계산할게요.”
그건 신앙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안 믿었다. 다만 자기 감각을 오염된 계측기 취급하기로 하고, 대신 쓸 다른 계측기를 골랐을 뿐이었다. 하필 그게 도하였다.
오후 수업이 끝난 학교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세아가 방문증을 목에 걸고 교문을 지났다. 예린이 미리 행정실에 말을 넣어 둔 참이었다.
“지워지는 게 ‘불리는 이름’이라면.” 그녀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무도 부른 적 없는 이름은 안 지워졌겠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산화 이전 기록.” 그녀는 이미 도서실 쪽으로 걷고 있었다. “서버에 있는 건 계속 불려요. 검색될 때마다, 출력될 때마다. 근데 종이는 아무도 안 열어보면 그냥 종이예요.”
“2년 전에 죽은 애 이름 하나 찾겠다고요.”
“찾을 데가 거기밖에 없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기사도, 추모 게시판도, 졸업 앨범 결번 페이지도 전부 ‘고인’, ‘그 학생’, ‘2학년 남학생’이에요. 이름만 없어요. 유족 뜻이라고 적혀 있고요.”
도서실 뒤편 폐기 상자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학교가 대출을 전산화하기 전까지 쓰던 종이 카드 뭉치. 세아가 장갑 한 켤레를 도하에게 던졌다.
“…나한텐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증거가 오염돼요. 죽었든 말든 손은 달렸잖아요.”
도하는 장갑을 끼고 상자를 붙들었다. 세아가 카드를 한 장씩 넘겼다. 2학년 3반. 죽은 아이의 반이었다.
그리고 스물세 번째 카드에서, 세아의 손이 멈췄다.
마지막 대출일은 2년 전 그달이었다. 그 애가 죽기 사흘 전. 카드 아래쪽, 대출자 이름 칸에는 볼펜을 너무 세게 눌러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파인 손글씨가 있었다. **배기훈.**
“이 애 이름은 두 번 없어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번은 유족이 가렸고, 한 번은 저쪽이 마저 지웠고. 그러니까 남은 데가 여기뿐인 거예요. 아무도 안 열어본 종이.”
“2년 동안 아무도 이름을 안 불렀다고요.”
“한 번도요.” 그녀가 카드를 조명에 비췄다. “이건 걔가 직접 쓴 거예요. 자기 손으로 자기 이름을 쓴 마지막 종이.”
야간 개방 시간에 맞춰 후문으로 들어갔다. 예린이 미리 열어 둔 문이었다.
교실 문을 밀자 냄새가 먼저 나왔다. 비 젖은 흙. 그리고 소독약. 도하는 문턱에서 숨을 멈췄다. 반갑지 않은 냄새였다. 반가울 수가 없는 냄새였다.
창가 맨 뒷자리. 2년째 아무도 앉지 않던 자리.
거기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형체. 가슴께에 하얀 이름표가 붙어 있고, 그 위에 남의 글씨로 박서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박서진.” 도하의 목소리가 굳었다. “예린이가 사흘 내내 부르던 그 이름이에요. 저게 그걸 달고 앉아 있어요.”
“남의 이름을요.”
“이름을 뺏긴 놈이, 남의 이름을 빌린 거죠.” 그가 형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름 하나에 사람이 둘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서진이가 밀려나는 거고.”
“예린이는요.”
“그 이름을 혼자 계속 불렀으니까요.”
그가 한 발 다가갔다. 목소리를 골랐다. 그리고 불렀다.
“배기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실은 그대로였다. 형광등도, 공기도, 그 애도. 도하는 그 침묵을 한참 견뎠다. 이름만 찾으면 되는 줄 알았다. 곰팡이 상자를 반나절 뒤졌다. 그 세 글자 하나만 보고.
그때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문질러 놓은 듯 흐릿했고, 목소리는 아주 멀리서 왔다.
*너는 나를 모르잖아.*
도하는 대꾸하지 못했다.
*이름을 아는 거랑, 아는 사람이 부르는 건 다르잖아.*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도하의 등이 굳는 걸 봤고, 그가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도 봤다. 그녀는 노트를 꺼냈다.
“뭐래요.”
“…아는 사람이 불러야 한대요.”
“아는 사람.”
“2년 동안 얘 이름을 알면서, 한 번도 안 부른 사람.”
세아가 그날 밤 새벽 두 시까지 판 건 사람이 아니라 검색 결과였다. 그녀는 화면을 하나씩 도하 앞으로 밀었다. 마이크를 잡은 건 늘 같은 얼굴이었다. 친구를 잃은 서연우 군은— 기사 제목마다 그 이름이 앞에 나왔다.
“계정 이름부터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녀가 스크롤을 내렸다. “게시물 사백 개 중에 삼백구십 개가 이 사람 일기예요. 오늘 내가 얼마나 힘든지. 사백 개를 다 훑었는데, 걔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와요.”
세아가 화면을 하나 더 띄웠다. 장례식 기사였다. 그리고 그녀가 건조하게 짚었다.
“이 애 장례식 기사에도, 이 애 사진이 없어요.”
도하는 화면을 오래 봤다. 죽은 아이는 자기 죽음에서조차 조연이었다. 검색창에 남은 건 전부 산 사람의 이름이었다. 7년치가 통째로 비어 있는 자기 이름이, 그 위에 잠깐 겹쳐 보였다.
세아가 스크롤을 맨 아래까지 내렸다. 계정을 만든 첫 주의 게시물 몇 개는 맞춤법이 엉망이었고, 좋아요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진짜였던 것 같았다. 그 뒤로 이백 번쯤, 그는 잘 쓰는 법을 배웠다.
“…이름을 훔친 게 그것만이 아니었네요.”
서연우는 스무 살이었고, 자기 대학 앞 카페에서 시험 기간용 노트북을 펴 놓고 있었다. 도하가 이름을 대자,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아, 그 얘기요.” 그가 이어폰 한쪽을 뺐다. “요즘도 가끔 물어보시는 분 있어요.”
“2년 동안 배기훈 이름, 한 번도 안 부르셨죠.”
연우의 손이 노트북 모서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억울해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도하를 서늘하게 했다.
“…사과하라는 거예요, 지금?” 그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웃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해 준 거예요. 아무도 안 할 때. 다들 두 달 만에 잊었어요. 나만 남았다고요. 그거라도 안 했으면 걘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어.”
세아가 뭐라고 하려는 걸, 도하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연우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자기 얘기를 했다.
“나는 서류상 없는 사람이에요.” 그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도 안 부르는 이름이에요. 통장도, 병원도, 우편물도 없어요.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안 불리면요.” 도하가 그를 봤다. “천천히, 없어져요.”
연우가 노트북을 닫았다. 가방을 챙기는 손이 조금 빨랐다.
“저 시험 있어요.”
그는 돌아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주머니에서 폰이 짧게 울렸다. 알림 하나. 그리고 하나 더.
그날 밤, 세아는 그 계정을 새로고침하며 셌다. 연우의 이름이 태그된 게시물이 한 줄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밤에만 서른일곱 개. 다음 날 아침엔 백열두 개였다.
“왜 지금이죠. 2년을 멀쩡히 있었는데.”
도하는 화면을 봤다. 대답이 늦게 나왔다.
“…오늘 낮에, 내가 걔 앞에서 그 이름을 불렀어요.”
그가 훔친 이름조차, 도로 거둬지는 중이었다.
연우가 교실에 나타난 건 이틀 뒤 밤이었다. 예린이 알려 준 후문으로 들어왔다. 사과하러 온 얼굴이 아니었다. 무서워서 온 얼굴이었다.
“내 이름이… 지워지고 있어요.” 그가 폰을 쥔 채 서 있었다. “친구들이 나 태그한 걸 못 찾아요. 어제는 조교가 내 이름을 두 번 물었어요.”
“그래서 왔어요?”
“…네.”
“그럼 됐어요.” 도하가 옆으로 비켜섰다. “옳은 일 하러 오는 이유가 꼭 착할 필요는 없으니까.”
연우가 빈 자리 앞에 섰다. 형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름표의 남의 이름은 아직 거기 있었다.
연우의 입이 두어 번 열렸다가 닫혔다. 목이 막힌 사람처럼, 소리가 안 나왔다. 2년간 마이크 앞에서 유창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2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문장을 뱉었다.
“미안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네 이름을 알면서도, 한 번도 안 불렀어.”
교실의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
“…배기훈.”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이름표 위의 남의 이름이, 물에 번지듯 흐려졌다. 그 자리에 다른 글씨가 떠올랐다. 볼펜을 너무 세게 눌러 종이 뒷면까지 파이던, 그 손글씨였다. 세 글자.
그것이 자기 이름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처음 읽는 사람처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배. 기. 훈.*
그리고 흩어졌다.
빈 의자만 남은 자리에서, 도하는 무릎을 꿇고 책상 밑을 손으로 훑었다. 손끝에 뭔가 걸렸다. 물에 번진, 검은 고리 하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폰을 꺼내 그것을 찍었다.
그날 밤, 학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도하의 폰이 울렸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세아가 즉시 녹음기를 켰다. 그녀의 손이 빨랐다. 도하가 스피커를 눌렀다.
빗소리 같은 긴 잡음. 그 안에서 목소리가 하나, 아주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장. 세. 아.”*
호명이었다. 명부를 읽는 사람의 억양이었다.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손을 뻗어 녹음기를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되감았다. 세 번 돌렸다. 해당 구간만, 정확히 그 구간만, 백색 잡음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 다시, 매 순간 녹음 버튼을 눌렀다.
상담소로 돌아온 그 밤, 도하는 테이블에 사진 석 장을 늘어놨다.
민규네 현관의 물 자국. 재개발 아파트 문틀. 그리고 그 교실, 빈 자리 책상 밑에서 찍은 것. 셋 다 같은 모양이었다. 물에 번진, 검은 고리 하나.
세아가 그 위에 자기 노트를 폈다. 그녀는 감정을 빼고, 표를 그렸다.
“당신이 그 냄새 맡았다고 한 현장. 민규 씨 집.”
“집이 아니라요.” 그가 그녀의 펜을 멈춰 세웠다. “거기서 나와 나를 따라오던 그것한테서. 그 재개발 복도. 그 교실.”
세아가 쓴 줄을 두 줄로 지우고, 도하의 말대로 다시 적었다. 그리고 그 옆 칸에 매듭이 나온 자리를 적었다. 민규네 현관. 아파트 문틀. 교실 책상 밑.
“셋. 셋.” 그녀가 펜을 놨다. “예외 없어요.”
도하는 그 표를 봤다.
냄새가 나는 곳에 매듭이 있었다. 매듭은 저절로 안 생겼다. 선생이 손수건 위의 그 한 올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저절로 생긴 게 아니다. 누가, 키운 거야.
그러니까 냄새는 괴담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 누가 묶어 키운 자리에서 나는 것이었다.
도하는 팔을 걷지 않았다. 걷을 필요가 없었다. 그 냄새는 7년째 그의 베개에 배어 있었다. 민규를 따라오던 그 형체에게서 처음 맡았던 밤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여태 그건 그냥 자기 냄새였다. 방금 전까지는.
세아가 그를 봤다. 그의 손이 표 위에서 멈춰 있었다. 넷째 칸이 비어 있었다.
“…왜 그래요.”
도하는 그 빈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태 몰랐던 건 냄새가 아니었다. 냄새의 뜻이었다.
“…그럼 나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가 키운 거예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넷째 칸을 비워 둔 채, 그 옆에 물음표를 하나 그렸다. 십 년 동안 소견서에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기호였다.
예린은 다음 날 아침, 자기 교실에서 눈을 떴다. 옆자리에 서진이 앉아 있었고, 서진은 예린에게 어제 왜 답장을 안 했냐고 물었다. 둘 다, 자기들이 어디까지 없었는지 몰랐다.
연우는 용서받지 못했다. 아무도 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얻은 건 조용함뿐이었다. 태그가 돌아온 뒤에도, 이제 아무도 그의 이름을 특별히 부르지 않는 조용함.
사흘 뒤, 상담소.
세아가 커피를 놓다가 멈췄다. 도하의 셔츠 깃이 조금 젖혀져 있었다.
“…거기.”
“뭐요.”
“목 뒤에.”
도하가 손을 뒤로 뻗어 목덜미를 만졌다. 아무것도 안 만져졌다. 그는 거울을 찾다가 그만뒀다. 거울로도 그 자리는 잘 안 보였다.
“자국이에요. 손등 거랑 같은 색.”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언제 생겼어요.”
도하가 날짜를 세려고 입을 뗐다. 그러다 멈췄다. 세는 손가락이 어디선가 걸렸다.
“…모르겠어요.” 그가 천천히 말했다. “세는 게 안 돼요. 스무 살 언저리가… 통째로 없어요. 그 한 해가.”
세아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넷째 칸 옆의 물음표 밑이었다.
그가 자기 눈으로는 절대 못 보는 자리였다. 손목이었다가, 팔뚝이었다가, 손등이었다. 이제 그것이 그의 등 뒤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예린이었다. 인사하러 왔다며, 손에 든 봉지를 흔들었다.
“선생님, 그때 진짜 감사했어요.” 그녀가 세아에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 선 도하를 봤다. 잠깐 봤다. 그리고 다시 봤다.
“저기… 누구세요?”
상담소가 조용해졌다.
도하의 입이 반쯤 열렸다. 이름을 대려던 참이었다. 그는 그걸 삼켰다.
예린의 손목에서 검은 머리끈이 한 바퀴 돌았다. 그 애는 자기가 되찾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신 그를 잊었다.
“지울 이름이 없다면서요.” 그녀가 그를 봤다.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없죠.” 그가 예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 말고, 나를 지우나 보네요.”
지워짐이, 이번엔 그의 쪽으로 옮겨 붙어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아이는 흩어졌고, 그 대가로 지워지기 시작한 건 그를 부르지 않은 자가 아니라 — 그를 본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