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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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시작이라는 말

사건이 끝난 지 나흘째 밤, 심야상담소는 오랜만에 조용했다.

의뢰 전화도, 멋대로 열리던 캐비닛도 잠잠했다. 도하는 낡은 소파에 늘어져 식은 컵라면을 의미 없이 휘저었고, 세아는 맞은편에서 종이컵 커피를 홀짝였다. 둘 사이에 사건이 놓여 있지 않은 건, 이상하게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둘 다 어색해했다.

도하 · 세아
도하 · 세아 ― 사이에 사건이 없던, 처음의 밤.

“그쪽은.” 세아가 컵 너머로 그를 봤다. “원래 직업이 뭐였어요. 이거 하기 전에.”

“…기억 안 나요.”

“농담 말고.”

“농담 아닌데.” 도하가 면을 한 젓가락 들었다가 도로 놨다. “진짜로, 잘 기억이 안 나요. 한 몇 년 전부터가… 흐릿해.”

세아가 잠깐 그를 봤다. 평소 같으면 “기억상실은 통계적으로 외상 후 흔한 방어기제”라고 받아쳤을 그녀가,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자기 손으로 녹음기를 끈 뒤로, 그녀는 반박을 한 박자씩 늦췄다.

“민규 씨한테서.” 세아가 화제를 돌렸다. “문자 왔어요. 자정에 초인종 안 울린대요. 나흘째.”

“다행이네요.”

“그쪽 덕분이라고 적혀 있던데.”

“…아니에요. 그 사람이 푼 거예요. 나는 옆에 있었고.” 도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끝에 가서,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세아가 그걸 봤고, 못 본 척 커피를 마셨다. 사기꾼이라고 멱살을 잡던 게 일주일 전이었다.

“이거 하나는 인정할게요.” 그녀가 컵을 내려놨다. “당신이 사기꾼이면, 세상에서 제일 손해 보는 사기꾼이에요. 돈도 안 받고, 매번 더 피곤해 보이고.”

도하가 픽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식었다. 그는 소매를 슬쩍 끌어내려, 손등의 자국을 가렸다. 더 피곤해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세아가 손 씻으러 일어난 사이, 도하는 망설이다 안쪽 방의 문을 밀었다. 향내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선생은 늘 앉던 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들어온 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선생님.” 도하가 문턱에서 말했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그 물 자국 속 매듭. ‘누가 키웠다’고 하셨잖아요. 누가요. 왜요.”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7년 전이랑 상관있어요?” 도하가 한 발 들어섰다. “내 손등에 자꾸 뭐가 옮겨오는 것도. 나한테서 나는 이 냄새도. 다… 같은 데서 시작된 거 아니에요. 이 자국이 어디서 오는지, 7년 전 그날… 그걸 내가 찾으면—”

“찾으면.” 선생이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그늘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렸다. 향 연기가 그의 얼굴을 절반 지웠다. “네가 그걸 찾으러 가면, 한 가지를 잊지 마라.”

선생
선생 ― 어떤 문은, 두드리는 순간 저쪽에서도 너를 알아본다.

“어떤 문은.” 노인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느릿했으나,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두드리는 순간, 저쪽에서도 너를 알아본다.”

“…그게 무슨—”

“근원을 직접 찾지 마라. 도하야. 이건 부탁이 아니다.” 선생이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규칙이다. 이 상담소의 첫 번째.”

도하는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답을 들으러 왔는데, 답 대신 자물쇠를 하나 더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물쇠는 늘,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묻지 말라는 말은 그의 궁금증을 끄기는커녕, 더 크게 켰다.

그가 입을 떼려는데, 거실 쪽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평소의 빠르고 날카로운 톤이 아니었다. 한 옥타브 낮고, 단어 사이가 떠 있었다.

“…윤도하 씨. 잠깐 와 봐요.”

도하가 거실로 나오자, 세아는 테이블 앞에 굳어 서 있었다.

그 앞에 출력물이 부채처럼 깔려 있었다. 도하의 눈이 그 위를 훑었다. 신원조회서, 등본, 누렇게 출력된 옛날 신문 한 장. 평소 그녀가 손에서 놓지 않던 녹음기는, 꺼진 채 테이블 모서리에 밀려나 있었다.

“뭐예요, 이거.”

“미안해요. 직업병이에요.” 세아는 도하를 보지 않았다. 종이만 봤다. “당신, 과학으로 설명이 안 돼서… 그래서 사람을 팩트체크했어요. 국과수에서 하던 대로. 신원조회 돌리고, 기록 떼고.”

“그래서요.”

“그래서.” 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설명이… 안 돼요.”

세아가 등본 한 장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그다음 신문 기사를. 그다음 신원조회서를. 한 장씩, 망설이듯, 그러나 멈추지 않고.

세아
세아 ― 당신, 7년 전에 죽은 걸로 돼 있어요.

도하의 시선이 활자를 따라 내려갔다. 자기 이름. 자기 주민번호. 그리고 그 옆에, 도무지 자기 것 같지 않은 활자 하나.

“당신.” 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7년 전에… 죽은 걸로 돼 있어요.”

도하의 손에서 출력물이 떨렸다.

“그 뒤로.” 그녀가 신원조회서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기록이 하나도 없어요. 한 줄도. 7년 동안. 통장도, 진료도, 통신도— 당신은 7년 전 그날 이후로, 서류상 존재하질 않아요.”

도하는 그 빈 칸을 보았다. 7년. 흐릿하다고 했던 그 몇 년. 손등의 자국. 비 젖은 흙과 소독약. 자기에게서 나던 냄새.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7년 전이라는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가 마른 입을 뗐다. “난 몰랐어요. 이거. 진짜로.”

“알아요.”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합리는, 이번엔 그를 의심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당신 얼굴 보면 알아요. 당신도 지금 처음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더… 무서운 거예요.”

바로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서 전화가 울렸다.

도하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을 밝혔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화면을 봤다. 발신번호가 떠 있어야 할 자리에, 글자만 있었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받지 마요.” 세아가 그의 팔을 잡았다.

도하는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받았다.

수화기 너머는 잡음뿐이었다. 빗소리 같기도, 물소리 같기도 한 긴 잡음. 그 안에서, 사람의 것인지 아닌지 모를 목소리가 단 한마디를 흘렸다.

“이제 시작이야.”

전화가 끊겼다.

도하는 화면을 노려보다, 통화 기록의 그 한 줄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기를 기다렸다. 한 박자 뒤, 신호 대신 기계음이 무심하게 답했다.

“— 없는 번호입니다.”

세아가 그의 얼굴을 봤다. 도하는 펼쳐진 서류와, 손안의 휴대폰을 번갈아 봤다. 끝난 줄 알았다. 나흘 전 그 현관에서, 사건 하나를 분명히 닫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했다.

7년 전에 죽은 남자가, 자기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그 밤 — 없는 번호에서 걸려온 목소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을 말했다. 닫은 줄 알았던 사건은, 사실 더 큰 무언가의 입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