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ovela
KOEN
← 내가 그린 골목에 누군가 서 있었다

6화. 규칙

새벽 세 시. 하리의 다이어리는 절반이 시우의 글씨로 메워져 있었다. “이건 작가님이 적어요.” 하리가 펜을 떠밀었다. “작가님 기억이잖아요. 내가 대신 적으면… 나중에 자기 글씨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우는 묻지 않았다. 그냥, 펜을 받아 들었다. 종이에 쓰는 글씨는,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우 · 하리
시우 · 하리 ― 밤새, 규칙을 적었다.

정리해 봐요. 아무거나 그린다고 다 진짜가 되는 건 아니죠? 어제 그건 안 됐다면서요.

…돈다발이요. 한 장 가득 그렸어요. 내 그림 중에 제일 잘 그렸을걸요.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갖고 싶다, 그 마음만으론 안 되는 거예요. 골목을 그릴 땐 달랐어요. 욕심이 아니었거든요.

진심으로 완성한 것만, 진짜가 된다. 욕심으론 안 된다.

대신, 그만큼 가져가요. 기억을. 커피 한 잔엔 어제 하루가 흐릿해졌고, 할머니를 살린 그림 다음 날엔― 내가 어디서 자랐는지, 친구 얼굴 하나가 안 떠올라요. 큰 걸 살리면, 큰 걸 가져가는 거예요.

하리의 펜이 멈췄다. 잠깐 시우를 보더니, 그녀는 다이어리를 앞쪽으로 넘겼다. 며칠 전 날짜에서 손이 멎었다.

커피 한 잔엔 어제 하루가 아니었어요. 통화 상대 하나였어요.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 이름도, 목소리도, 통화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날 작가님이 저한테 그렇게 말했고, 제가 여기 적었어요.

― 크기가 아니에요.
― 크기가 아니에요.

그럼 골목은요? 창밖 세상을 통째로 갈아엎었잖아요. 근데 값은― 어릴 적 부엌 하나였어요. 비 오는 날 어머니가 라면 끓여주던.

시우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울이 뒤집혀 있었다. 세상을 통째로 바꾼 그림은 유년의 한 귀퉁이를 가져갔고, 식은 커피 한 잔은 사람을 하나 가져갔다.

크기가 아니에요. 그림이 큰지 작은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하리가 펜 끝으로 종이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자기 말을 자기가 확인하는 사람처럼.

값은… 그 마음을 어디서 길어왔느냐로 매겨지는 거예요. 얕은 데서 퍼왔으면 얕은 걸. 사람한테서 퍼왔으면― 그 사람을.

시우는 골목을 그리던 밤을 떠올렸다. 가본 적 없는 골목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리웠다. 그 그리움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김 서린 창문. 비 오는 날의 부엌. 지금은 아무리 더듬어도 잡히는 게 없는 자리.

그러니까― 누굴 떠올리면서는, 절대 그리지 마요.

방이 조용해졌다. 시우는 목이 말랐다.

하나 더 있어요. 그릴 때마다, 그 사람이 가까워져요. 처음엔 골목 끝이었는데, 어제는 우리 빌라 앞이었어요. 한 걸음씩, 꼭 셈하듯이.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이 창문 앞까지.

그럼 답은 하나네요. 안 그리면 되잖아요. 영원히. 웹툰? 접어요. 오른손 잠깐 부러진 셈 치고.

시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는 것 말고 자기가 뭘 할 줄 아는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도망칠 데가 그림밖에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유일한 도망처가, 이제 자길 한 입씩 베어 먹고 있었다.

…네. 안 그릴게요. 끊어볼게요.

시우
시우 ― 손이 비었다.

그날 시우는 태블릿 전원을 껐다. 화면이 까맣게 죽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펜을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고, 잘 닫히지도 않는 서랍을 억지로 밀어 닫았다. 처음으로, 그리지 않는 밤이 왔다.

커튼 틈으로 흘깃 내다본 창밖. 가로등 아래 그 사람은― 그날만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시우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아침에 그를 깨운 건 하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눈이 떠졌다. 하리는 다이어리를 펼친 채 책상 앞에 서 있었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페이지를 그에게 돌려 보였다. 밤새 시우가 자기 손으로 메운 페이지들이― 전부 백지였다. 괘선만 남고, 글자가 있던 자리는 매끈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인 적 없는 종이처럼.

하리
하리 ― 밤새 적은 것이, 아침엔 없었다.

작가님 손에서 나온 건… 다 사라져요. 후기도 그랬잖아요. 그림도, 글씨도. 작가님 손에서 나온 건 전부 저쪽 거예요.

하리가 시우의 손에서 펜을 도로 가져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사라지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의 손이었다.

앞으론 제가 적을게요. 제 손에서 나온 건, 안 사라지니까.

그건 그때까지 둘이 본 전부이기도 했다. 지워진 것은 하나같이 시우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고, 하리가 적은 것은 한 줄도 지워지지 않았다. 관찰은 정확했다. 다만 그게 왜 그런지는, 둘 다 몰랐다.

하리는 백지가 된 페이지들을 넘기고, 새 장에 처음부터 다시 적었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넷이 된 규칙이 그렇게 종이 위에 다시 섰다. 적고 나니 더 무서웠다.

규칙은 넷이 되었고, 펜은 하리에게 있었다. 이대로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시우는 믿었다. …사흘 뒤, 메일 한 통이 도착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