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라진 작가
어젯밤 전화 끝에 하리가 말했다. 주소만 알려줘요, 내일 갈게요. 거절할 말을 찾는 사이에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리가 처음으로 그의 방에 왔다. 낡은 다이어리 두 권을 가슴에 끌어안고서.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눈이 단단한 애였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인사보다 먼저 휴대폰을 들어 시우의 얼굴을 찍었다.
…뭐 하는 거예요?
기록이요. 6월 14일 밤, 시우 작가님, 아직 멀쩡함. 작가님이 또 누굴 잊기 전에 적어두려고요. 작가님은 못 적잖아요. 자기가 뭘 잃었는지도 모르니까.
다이어리는 두 권이었다. 한 권은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새것이었고, 다른 한 권은 표지 모서리가 닳아 하얘져 있었다. 그녀가 두 권을 무릎에 겹쳐 놓을 때, 아래쪽 낡은 것의 첫 장이 뜯겨 나간 자리가 보였다. 뜯긴 가장자리가 아직 톱니처럼 남아 있었다. 시우는 묻지 않았다. 하리도 말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웃으려는데, 하리가 다이어리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0년 전 웹 연재를 인쇄한, 누렇게 바랜 출력물. 제목도 화풍도 낯설었다. 그런데 배경으로 깔린 골목 한 컷이― 시우가 그린 그 골목과,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빗줄기 각도까지.
이 작가, 필명이 「관(觀)」이에요. 어느 날 연재 중에 그냥 사라졌어요. 실종 신고만 남고. 근데 마지막 화가… 좀 이상해요.
그녀가 노트북을 열어 그 회차를 띄웠다. 마지막 화엔 그림이 없었다. 텅 빈 흰 화면에, 텍스트 한 줄뿐이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도 이 골목만은 기억한다. 다음 사람이, 부디 멈추기를.」
시우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다음 사람…” 그가 작게 읊조렸다. 이제, 네 차례야. 그 문자가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모르는 번호. 빗속의 사람. 사라지는 기억. 10년 전 같은 골목을 그리고 사라진 작가. 조각들이 한 줄로 꿰이기 시작했다.
작가님, 창밖에 서 있다는 그 사람… 혹시.
동시에 창을 봤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그 사람이, 처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빗물에 번진 얼굴은― 늙고 지쳐 있었지만, 분명히 어딘가, 시우와 닮아 있었다. 눈매가. 콧날이. 마치 수십 년 뒤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처럼.